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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샨띠정 May 31. 2024

이야기 친구, 엄마

이야기꾼,  엄마와 이모들

엄마 형제는 가운데 중앙에 아들 하나, 그러니까 외삼촌 한 분을 중심으로 위로 딸 둘에 아래로 딸이 둘이다. 그 오 남매 중에 둘째 딸이 우리 엄마다. 엄마 위로 큰 이모는 아들만 둘을 두셨고, 외삼촌도 아들만 둘을 두셨다. 셋째 형옥이 이모는 딸을 둘, 막내 옥 이모는 딸을 셋을 얻었고, 우리 엄마만 삼 남매를 두셔서 아들과 딸이 다 있다며 형제들의 부러움을 샀다. 엄마 형제들의 우애는 남다르시다. 나도 그런 엄마 형제들의 우애가 부러울 때가 있다. 지금도 일 년에 두 차례 꼭 여행을 같이 다니시며 시간을 함께 보내시니 얼마나 좋은가?

무엇보다도 엄마와 이모들은 전화기를 붙잡으면 한 시간은 기본으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느라 전화통이 뜨거워 불이 날 지경이었다. 예전에 엄마한테 집 전화를 걸면 '뛰 뛰 뛰' 거리는 통화 중 소리에 짜증이 날 때도 있었고, 심지어 해외 생활을 하던 내가 엄마에게 국제 전화를 걸면 집 전화는 이모와 통화를 하고, 핸드폰으로는 나랑 통화를 할 때도 있었다. 옛날에는 집 전화 요금을 사용한 만큼 내던 때라 아빠는 전화 요금이 많이 나온다며 애를 태우시기도 했다. 아무튼  끝없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어렸을 때 종종 이모들이 우리 집에 놀러 오시거나, 우리가 이모집에 놀러 가서 시간을 보낼 때마다 나는 엄마와 이모들의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귀를 쫑긋 세워서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들으려 애를 썼다. 특히 우리 큰 이모는 누구보다도 재미나게 이야기를 잘하시는 이야기꾼이셨다.


가끔 어렸을 때 이모는 소설의 줄거리를 이야기로 풀어서 들려주시기도 했으며, 심지어 실제 드리마보다도 큰 이모가 들려주는 드라마 줄거리가 더 재미있어서 드라마를 보고는 다시 큰 이모의 이야기를 듣고 싶을 때도 있었을 정도였다. 구수한 입담이 대단하셨다.


 지금도 큰 이모가 온갖 추임새와 묘사를 섞어 가며 들려주셨던 영국의 고전 소설 '테스'의 이야기를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소설로 읽기 전에 큰 이모가 먼저 들려주신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나중에야 책으로 읽었던 기억이 있다. 과연 책 속의 이야기가 큰 이모가 들려준 이야기만큼 사실적이고 재미있었을까? 이모가 들려주던 이야기는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웠으며, 잘 요리된 훌륭한 음식을 먹는 것처럼 맛나고 감칠맛 나는 이야기 밥상과도 같았다.


엄마도 큰 이모 못지않게 우리에게 옛날이야기와 세상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셨다. 큰 이모에게 들었던 '테스' 이야기를 엄마가 들려주는 엄마 버전으로 다시 듣기도 했다. 엄마 또한 최고의 이야기꾼이셨다.


무엇보다 엄마는 나의 이야기 친구였다. 엄마도 내게 많은 이야깃거리를 들고 와서 들려주셨으며, 나 또한 엄마에게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상을 다 토해내다시피 엄마에게 이야기를 쏟아냈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은 꽤 멀었다. 어린아이가 걷기에는 상당히 먼 거리였다. 친구들과 학교 수업이 끝나면 길에서 놀다가 쉬다가를 반복하며 집으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나는 엄마를 찾았다. 엄마가 일을 하느라 바쁘시면 어서 엄마가 집으로 돌아오시기를 고대했다. 보통 나는 곧장 부엌으로 들어가 밥을 짓는 엄마 곁에 서서 하루 종일 학교에서 있었던 일과를 학교로 가는 등굣길 위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1교시부터 마지막 수업까지, 그리고 하교해서 마침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의 모든 과정을 하나도 빠짐없이 엄마에게 전달했다. 아니 다 이야기했다. 엄마는 밤을 하랴, 야채를 다듬으랴, 때론 빨래를 하랴, 청소를 하랴, 손을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내 얘기를 끝까지 다 들어주셨다. 추임새와 리액션은 기본으로 따라왔기에 나는 더 신이 나서 내 일상의 모든 이야기를 통째로 다 들려주곤 했다.


가끔 학교에서 속상한 일이 있을 때는 어서 집에 가서 엄마에게 얘기하고 싶어 시간이 빨리 가기를 기다렸고, 선생님께 칭찬을 듣거나 상장을 받았을 때는 학교에서부터 입이 근질근질했다. 마치 엄마가 곁에 계시기라도 해서 바로 신나게 이야기를 떠들어댈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들이 입술에 머물며 곧 튀어나올 태세를 하곤 했다.


엄마는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나의 친구들, 선생님, 학교 수업, 공부하는 내용들,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일들도, 좋은 일도, 힘든 일도,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까지도 다 알고 계셨다.

사춘기 시절에는 숨겨진 내 감정들의 이야기를 일기장에 적나라하게 다 적곤 했는데,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엄마는 내 비밀 일기장을 다 읽으셨단다. 그러시면서 모른 척, 안 본 척을 하시며 내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셨다. 얼굴이 빨개진다. 나쁜 엄마...


내가 좋아하던 선생님의 이야기도, 내가 좋아하던 선배의 이야기도, 친한 친구들과 싸우고 토라진 이야기도, 내가 바라본 세상의 이야기들을 모두 엄마에게 들려줬다. 그러한 습관은 성인이 되어서도 이어졌다. 학교나 직장에서 늦은 저녁에 돌아와서도 나는 방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거실에 앉아 하루 종일 엄마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내가 경험한 하루를 엄마에게 들려주고 나서야 내 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내려놓고, 옷을 갈아입었다. 기분이 정말 안 좋았을 때나 극도로 피곤하고 바쁜 시간 외에는 늘 그렇게 했다. 때론 엄마가 안방에 계실 때는 바로 안방으로 들어가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으면서도 거실에 앉아있는 엄마를 향해 이야기를 쏟아내곤 했다.

   

엄마와 멀리 떨어져 있으면, 입이 근질근질한 게 마음까지도 가려워 벌레가 온몸을 지나가는 것처럼 힘들었던 시간이 있었다. 결혼해서 따로 살게 되었을 때도 틈나는 대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얘기를 나눴다. 내게 위안이 되었다. 그리움의 위로.


멀리 영국으로 건너가서 살았던 6년 동안은 벌써 오래전 일이다. 지금처럼 SNS나 인터넷 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국제전화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생활비를 아껴서 국제전화카드를 사고, 가장 싸게 국제전화를 사용할 수 있는 번호를 사용해서 한국에 계시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곤 했다. 비싼 국제전화 요금을 감당하기 어려워 최대한 짧게 대화를 마치고 전화를 끊어야만 할 때는 그리움이 복받쳐 올라오곤 했다. 타국에서의 외로움과 향수를 달래줄 엄마와의 대화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했지만, 오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내게 허락되지 않았다.

결국에는 그리움에 목마른 날 위해 부모님이 비행기를 타고 영국으로 날아와 한 달 동안 실컷 함께 지내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여행을 하고 가셨다.


인도에서 있었던 8년 이상의 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인도에서 지내던 때는 070 인터넷 전화도 생기고, 카카오톡도 있었으니 훨씬 상황이 좋아졌다. 보통 나는 영상통화를 켜놓고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나중에는 엄마가 나와 통화를 하면서 드라마를 보시며 정신을 팔기도 했다. 시차 때문에 엄마와 통화할 수 있는 시간이 하필이면 엄마가 좋아하는 드라마가 나오는 시간이 걸리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틈만 나면 나는 엄마와 전화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가 종종 엄마는 나와 동시에 이모와 통화를 하실 경우가 생기기도 해서 나는 엄마의 전화 너머로 들리는 수화기를 통해 들리는 이모 목소리를 향해 인사를 나누곤 했다. 나의 그리운 이모들.


아무튼 나도 엄마와 이모들의 피를 물려받았다. 물론 엄마는 아빠가 여자들보다 수다가 더 심하다고 핀잔을 주시기도 하지만, 나는 외가의 피를 받았다고 말하고 싶다. 이모들의 이야기는 세상 그 어떤 이야기들보다 달콤했고, 고소했으며, 재미났다.

이모들이 우리 집에 오시면 밤을 지새우며 이불에 누워서 불을 끄고도 이야기를 나누셨다. 나는 자는 척하면서 그 곁에 누워서 엄마와 이모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다 듣고 싶어서 잠을 자지 않으려 부단히 도 애썼는데, 어느덧 나는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듣지 못하고 꿈나라로 가버리곤 했으니 얼마나 안타까웠던가!


지금도 엄마와 많은 이야기들을 나눈다. 예전보다는 줄었지만 말이다.

엄마도 내 얘기들을 다 들어줄 체력이 달리는 할머니가 되셨으니, 어떻게 내 모든 이야기를 다 들려드릴 수가 있단 말인가? 어떤 이야기는 모르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고, 어떤 것은 너무 시시해서 들어도 재미가 없을 테니 말이다.


요즘도 내가 전화를 며칠 걸지 않으면,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별일 없냐? 왜 조용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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