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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샨띠정 May 23. 2024

고소하고 뽀송뽀송한 그 저녁 시간

어린 시절 행복했던 순간

내 어린 시절의 가장 행복했던 추억, 내 기억 속의 가장 포근한 순간은 하루 일과가 다 끝난 후의 저녁, 밤 시간이었다.

몸을 깨끗이 씻고, 내복으로 갈아입고는 잠 잘 채비를 마치면 안방에 이부자리가 깔렸다.


"이불 펴라."

엄마의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리 삼 남매는 윗방 장롱 안에 쌓여있던 커다란 이불을 낑낑대면서 끄집어 내렸다. 언제부터 우리가 방바닥 위에 이부자리를 펴고 잠잘 준비를 하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나의 행복했던 순간은 그 이전의 시간들이다. 우리가 직접 이부자리를 펴지 않던 시절의 추억이다. 나는 이부자리가 깔리기 전의 그 순간을 사랑했다.  아니 행복했다.


우리가 자라 힘이 더 세지기 전에는 줄곧 엄마가 우리를 위해 두꺼운 요를 바닥에 깔고는 그 위에 이불을 펼치시곤 했다. 개구쟁이 삼 남매는 엄마가 바닥에 요를 펼치기가 무섭게 그 위에서 뒹굴기 시작해서 멈추질 않았다. 겨우 덮어야 할 이불을 두꺼운 요 위에서 뒹굴고 있는 세 아이들 위로 던져놓다시피 하시면 우리는 이불을 돌돌 말아 김밥 놀이를 하기 일쑤였다.


우리의 이불은 늘 뽀송뽀송했다. 우리는 비누 냄새가 늘 향긋해서 신선한 비누 향을 킁킁대며 맡으며 강아지처럼 좋아했다. 이 세상 그 어떤 곳보다 청결하고, 새하얀 곳. 포근하고 푹신푹신한 그 자리는 내 마음의 안식처였다. 정신없이 놀고 흘러가던 긴긴 하루 동안 그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종종 이부자리를 펴기 전에는 안방에 둘러앉아 겨울에는 고구마를 깎아 먹었다. 주로 아빠가 아빠의 전용 칼(지금도 아빠의 그 만능 칼을 기억한다.)로 깎아서 우리 입에 넣어주시곤 하셨다. 아빠의 만능 칼은 오동통한 알밤의 껍질을 벗겨서 먹기 좋게 하얀 생밤을 오독오독 씹어 먹게도 했으며, 푹 삶아 익힌 밤의 딱딱한 껍질을 살짝 벗겨서 반으로 갈라주시면 우리는 작은 찻숟가락 티스푼으로 알밤을 쏙쏙 파먹었다. 생각해 보면 자상한 아빠셨다. 아빠의 손은 바삐 움직였고, 우리는 눈이 빠지도록 아빠의 손끝에서 껍질이 벗겨져 준비를 마치는 먹거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셋이서 순서를 기다렸다. 먹을 차례를.


땅콩을 삶거나 볶아서 커다란 그릇에 소복이 담아 안방 중앙에 놓고는 온 가족이 둘러앉아 땅콩 껍질을 벗겨 고소한 땅콩을 까먹었다. 막내 은영이는 입을 벌리고 땅콩을 잘도 받아먹었다.


겨울에는 먹거리가 더 많았다. 윗방 귤 상자에서 귤을 꺼내 먹기도 하고, 커다란 자루에 들어있던 쌀 튀밥과 그 중간중간 섞여있던 가래떡 튀밥을 찾아 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내 어린 시절 저녁 시간은 고소하고 뽀송뽀송하고, 맛있었다.

내가 꼬마였던 그 시절엔 흑백텔레비전이 있기도 했지만, 라디오를 더 많이 듣던 시대였고, 저녁 시간은 우리만의 우리들의 시간을 즐길 수 있었으니 어쩌면 지금보다 행복했을까?


엄마는 저녁 일과를 마치시고 종종 우리에게 먼저 이부자리를 깔아주고는 엄마 무릎 위에 우리를 순서대로 눕히셨다. 우리는 차례대로 엄마의 손에 우리의 두 귀를 맡겼다. 귀를 간지럽히면서 귓속의 귀지를 깨끗하게 청소해 주시는 엄마의 손가락 끝에 있는 귀이개가 내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웠다. 간지러우면서도 짜릿한 그 순간의 기쁨과 황홀한 기분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밤에는 손톱을 깎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도 어떤 날은 우리의 손가락을 엄마 손에 맡긴 채 손톱이 잘려나가는 것을 아쉽게 바라보았고, 사라진 손톱을 찾느라 온 방을 뒤지기도 했다.


가끔은 저녁 밥상을 물리고 부엌일을 다 미친 엄마는 이부자리가 깔리기 전에 새하얀 면으로 된 요 와 이불 커버를 빨아서 빳빳하게 풀을 먹어 다듬잇돌 위에 놓고는 리듬에 맞춰 방망이를 두드리셨다.

'따다 다다 따다 다다....'

우리도 해보겠다고 서로 앞을 다투며 방망이를 들어 다듬잇돌을 두드리는 흉내를 내면서 엄마의 일을 방해하던 삼 남매에게 기꺼이 방망이를 맡기셨던 엄마의 너그러운 마음에 지금도 고맙다. 그리고 엄마의 다림질이 이어졌다.


그렇게 모든 과정을 마친 이불과 요 커버는 엄마의 커다란 바늘과 실에 의존해서 우리가 깔고 덮어야 할 솜이불을 사뿐히 덮어주곤 했다. 엄마의 바느질 솜씨는 누구보다도 훌륭했다. 정갈하고도 반듯하게 흐트러지지 않게 누벼진 고운 이불 커버에 빨강과 파랑의 비단 덮개까지 씌워져 완성된 뽀송한 이불은 우리의 몸을 품어주고, 엄마 품처럼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우리는 깔깔거리며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가 꿀잠을 청하고 꿈나라로 떠나곤 했다.   


지금도 보드라운 이불을 몸에 감쌀 때마다 그날의 그 시절, 그날 밤이 떠오른다. 그 행복했던 순간이.


내 마음에 평안과 진정한 쉼을 주던 그 소중한 순간을 허락하신 부모님과 그날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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