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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샨띠정 May 18. 2024

아빠와 오토바이

놀이대장 울 아버지

언제부터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무튼 어느 날부터인가 우리 집 마당에 아빠의 오토바이가 세워져 있었다.

그 오토바이는 우리의 교통수단이기도 했지만, 가장 신나고 다이내믹한 놀이 기구였다.

우리 삼 남매는 줄곧 아빠의 오토바이에 탑승을 하고 휘날리는 바람을 맞대고 세상을 가로질렀다.


내 기억에 할머니는 어쩌다 한 번씩 오토바이에 올라타시긴 했지만, 즐겨하지 않으셨다. 줄곧 우리 삼 남매와 엄마 그렇게 다섯 명이 오토바이를 타고 누볐다. 아빠가 중앙에 앉아 손잡이를 굳게 잡으시면, 남동생은 앞쪽에 앉아 마치 자신이 오토바이를 운전하는 양 입꼬리가 귀에 걸리고, 으쓱하여 의기양양했다. 바로 아빠 뒤로 막내 여동생이 앉고, 그 뒤로는 내가 몸을 바짝 붙여서 내 뒤로 엄마가 앉아 우리를 긴 팔로 감싸며 호위해 주시도록 해드렸다.  


부릉부릉 오토바이  시동이 걸리고, 출발하는 그 작은 순간 우리 다섯 명의 몸이 뒤로 살짝 젖혀지며 넘어질 것만 같은 그 느낌은 그 당시 놀이터에 있던 그 어떤 놀이기구가 줄 수 없는 쾌감을 선사했다. 놀이동산이 없었던 때라 비교할 수조차 없지만, 지금으로 보면 에버랜드의 T-렉스를 타는 것만큼의 짜릿하고 무서운 즐거움이었다.


입안을 가득 채우는 바람을 몰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숨 쉬는 콧구멍에 몰아치는 공기를 뚫고 호흡을 이어가기 위해 숨을 멈추다 다시 쉬기를 반복했다. 두 눈을 감아 온몸으로 오토바이와 함께 느껴지는 속도를 음미하다가 용기를 내어 눈을 뜨고 쏜살같이 뒤로 멀어지는 들판과 사람들을 훑어보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 얼마나 신나는 놀이의 순간이었던가?


가끔 나는 앞자리를 차지한 남동생이 부럽기도 하여 그 자리를 탐내기도 했는데, 우리의 지정석은 거의 바뀌지 않은 채로 정해진 규칙을 따랐다. 지금은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오토바이가 흔하지 않던 시대였고, 자동차도 많지 않았던 때니 오토바이 헬멧을 쓰면 그런대로 허용되었다. 돌아보면 안전하게 오토바이를 타고 다닐 수 있었던 것도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우리 집에 같이 살던 반려견 메리도 우리 오토바이를 누구보다도 좋아했다. 강아지는 멀리서 일을 보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빠의 오토바이 소리를 듣고는 1킬로미터 밖에서도  미리 쏜살같이 달려 마중을 나가 아빠를 맞이했다. 빠르게 달리는 아빠의 오토바이를 따라 집으로 돌아와 혀를 내밀고 웃음을 짓던 메리를 기억한다. 뿐만 아니라 가까운 거리는 틀림없이 오토바이를 따라다니며, 아빠가 일을 다 보실 때까지 오토바이 곁에서 든든히 지키며 앉아 있곤 했다.

메리는 우리 온 가족이 오토바이를 타고 외출을 하던 날은 한참을 달려서 따라 나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갔는데, 우리가 집으로 돌아갈 때면 어김없이 달음박질하여 곧장 마중을 나왔다. 열렬한 강아지의 환영을 받으며 오토바이 부대 가족이 집으로 귀환하곤 했다. 마치 오토바이를 타고 마법의 세계를 달리다가 현실 세계로 돌아온 것처럼.

아빠는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놀이대장이셨다. 모든 운동게임을 아빠로부터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든이 훨씬 지난 지금도 줄곧 스포츠 채널을 보시고 즐기시니 예전 젊은 시절에는 오죽하셨을지 상상이 될 것이다.

일요일 오후에는 항상 텔레비전으로 레슬링과 권투 경기를 시청했으며,  우리는 평일 저녁에 고교야구와 농구대잔치를 저녁 밥상을 먹으며 응원했다. 아빠는 경기 규칙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셨다. 파울. 안타, 삼진아웃, 볼, 도루...


내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아빠와 삼촌은  우리를 안방 한가운데에 두고는 게임을 시키셨다. 팔씨름부터 닭싸움, 씨름까지도. 주로 운동선수는 나와 남동생이 출전했고, 줄곧 내가 이기는 승자가 되었다. 누나한테 지기만 하는 남동생은 아빠와 삼촌의 등쌀에 못 이겨 경기에 출전해서 패배를 일삼았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동생이 키가 자라면서 자연스레 나를 이기기 시작했다. 안방에서 시작된 씨름과 닭싸움은 가끔 마당에서도 이뤄졌다. 하기 싫어하는 우리를 훈련시키기 위해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우리는 아빠 앞에서 선수가 되곤 했다.


우리끼리만 겨루던 팔씨름은 나중에 아빠를 상대로 이겨야만 했는데, 아무리 해봐도 우리는 아빠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아빠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저녁때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시면, 우리에게 양말을 벗기게 하셨다. 그것도 아빠가 만든 하나의 게임이었다. 아빠는 우리가 양말을 벗기려고 하면 언제나 온 힘을 다해 발목과 발바닥, 발가락까지 뻣뻣하게 만들어서 벗기지 어렵게 만들었다. 동생과 나는 양쪽 발을 하나씩 붙잡고 누가 먼저 양말을 벗기는지 대결을 펼치며 전심을 다해 아빠의 냄새나는 양말을 붙잡고 늘어졌다. 코끝에서 풍겨 나는 양말 고린내는 다 잊어버린 채로.


아빠가 누워서 다리를 세워 태워주던 비행기를 타고 세계 여행을 다녔으며, 튼튼하게 버티고 계시던 아빠의 양팔에 동동 매달려 깔깔거리며 웃던 유흥과 즐거움을 추억으로 선물 받았다.


저녁밥상을 물리고 엄마가 설거지를 하시는 동안 아담과 하와에서부터 스데반과 바울의 이야기까지 들려주셨던 아빠의 성경이야기는 내가 들었던 그 모든 설교보다도 가장 재미있고, 은혜로우며, 생동감 있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나는 종종 그때 그 어린 시절 방 한가운데서 벌어졌던 수많은 놀이와 게임의 순간을 떠올린다.

고난과 힘든 역경 속에서도 인생을 낙천적이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하는 근원의 힘이 그곳에서 오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시아버님을 간병하며 병원 간이침대에 앉아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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