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쪽 길 가로는 세상에서 가장 두껍고 커다란 벚나무가 적당한 간격으로 줄을 지어 운동장을 호위하며 'ㄱ'자를 만들어 우뚝 서 있었다. 봄마다 꽃을 피워낸 아름드리 벚나무에서 꽃잎이 날리고, 가지마다 새순이 돋아나 울창한 나무 잎사귀로 뒤덮이면 전교생이 쉬어갈 수 있는 최고의 휴식처를 제공했다.
운동회가 열리면 특히 오른쪽 벚나무들 아래로 응원석이 준비되었다. 전교생이 청팀과 백팀으로 나뉘어 커다란 두 그룹이 시원한 벚나무 그늘 아래에 자리를 잡고 앉아 목이 터져라 응원가를 외쳤다. 6학년 오빠들이나 씩씩한 언니들이 응원단장을 맡았다. 이마엔 양면이 파란색과 흰색으로 구분된 머리띠를 질끈 묶었다. 가끔 손목에도 흰색과 파란색 띠를 묶기도 했는데, 팔찌를 한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줄을 맞춰 앉아있는 아이들 앞에서 각각 청색과 희색 깃발을 흔들며 외치던 응원단장 선배들의 모습이 내 눈에는 마치 어른들처럼 보였다. 6학년은 이미 학교에서 최고의 힘과 실력을 갖춘 우리의 대장이 아니었던가?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 당시엔 국민학교라고 불리던 우리 학교는 6학년들이 공부하던 건물이 따로 뒤 운동장의 작은 호숫가 옆 위로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높은 곳에 있었다. 그야말로 오직 6학년 그들만의 세계, 그들만의 리그와 같은 범접하기 어려운 곳으로 여겨졌던 곳이다.
나의 5학년, 가을 운동회가 열렸다. 학교 운동장엔 확성기에서 울려 나오는 커다란 음악소리가 온 학교를 뒤덮었다. 여름이 막 끝나고, 가을이 시작되던 9월쯤 되었을 것이다. 학교에 오던 기다란 흰색 길가에 쭉 늘어선 코스모스가 아직 흔들리며 춤을 추고, 단풍은 미처 물들지 못하고 초록빛을 품고 있었다. 하늘은 점점 높아갔고, 푸르름은 짙어만 갔다.
우리는 수업이 채 끝나기 전에 운동장에 다 같이 모여서 운동회 연습을 했다. 선생님의 호각소리와 마이크 소리, 확성기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에 맞춰 단체 무용을 배우고, 기마전과 체조를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하얀 모래처럼 부드러운 흙이 평평하게 다져져서 마치 단단한 빵 위를 걷는 것 같기도 하고, 폭신폭신하고 부드러운 스펀지 같은 느낌이었다. 초가을 햇살은 따사로웠지만, 따가운 햇살에 눈을 찡그리며 흘러내리는 땀을 훔쳐야만 했다. 한 사람이라도 틀리면 안 되었기에, 다시 또다시 연습을 계속했다. 부모님이 오시기로 했으니 가장 멋진 모습의 공연을 펼쳐드려야만 했다. 어떤 때는 우리끼리 학생들만 모여서 운동회를 하기도 했지만, 부모님을 초청해서 크게 열릴 때도 있었다.
마침내, 운동회가 열리던 날 아침. 바쁜 엄마가 학교에 오실지 안 오실지 궁금했다. 엄마는 우리에게 꼭 오시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나는 무슨 일이라도 생겨서 못 오시게 될까 봐 전전긍긍 애를 태웠다. 내가 연습하고 열심히 준비한 공연을 엄마가 꼭 봐주시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그리고 어쩌면 나는 언제나 예쁘고 멋스러운 엄마를 친구들과 선생님들께 보여드리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5학년이었으니, 남동생은 4학년, 여동생은 2학년으로 우리 삼 남매는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삼 남매가 두 살 터울이지만, 나 혼자만 8살에 학교에 들어가고는 남동생과 여동생은 7살에 학교에 들어가서 셋이서 옹기종기 다 같이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아이들이 셋이나 있으니 엄마는 학교에 안 오실 수 없으셨을 테다. 아무리 바쁘시다 할지라도. 학교에 오시면 또 셋을 챙기려면 얼마나 바쁘시겠는가?
나는 한복을 입고 운동장에서 연습한 강강술래를 공연했다. 4학년과 5학년 여학생들 전체가 두 개의 큰 원을 만들어서 쉴 새 없이 뛰고 또 뛰고, 돌고 돌며, 온 운동장을 누볐다. 한복을 입고 전통 가락에 맞추어 연습한 모형을 기억하며 달팽이를 만들어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 달팽이를 풀어 나오기도 했다. 두 개의 원을 이끌고 나가는 선두가 있었는데, 한편은 은숙이가 다른 한 편은 내가 맡았다. 은숙이는 운동 신경도 뛰어나고, 키도 컸으며 예뻤다. 뭐든 똑 부리 지게 잘하던 친구라서 걱정할 게 없었지만 나는 익숙하지 못했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모른다. 지금도 그날의 그 순간과 떨림을 몸과 마음이 기억하고 있다.
나는 모든 대형과 동작의 순서를 기억하고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만 무사히 공연이 끝낼 수 있었다. 뛰고 달리며 쉬지 않고 운동장을 누비며 강강술래를 하면서 숨이 차올랐다. 나는 헐떡이며 몸을 날려서 움직이다가 마지막 달팽이를 만들기 위해 빙글빙글 돌며 선두로 뛰면서 연습하며 기억해 둔 모형을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내가 자리를 제대로 잡아줘야만 뒤따라 오는 아이들의 줄이 자연스레 예쁜 모양을 완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감았던 달팽이를 풀며 바깥으로 돌아 나와 긴 줄을 만들며 강강술래가 마무리되었다. 그렇게 다행히 모든 순서가 무사히 끝났다.
공연을 마치고 쉬는 시간에 벚나무 그늘 아래에서 엄마를 만났다. 엄마는 커다란 안경을 끼고 검은색 긴치마를 입고 허리엔 가죽 벨트를 매고는 작은 꽃무늬가 그려진 블라우스를 입고 계셨다. 그전까지는 안경을 쓰지 않으셨던 엄마가 그즈음부터 안경을 쓰기 시작하셨다. 엄마는 항상 세련되고 멋쟁이셨다. 엄마의 패션 센스는 당시 동네의 다른 아주머니들의 패션을 유행시키곤 했다. 그날의 엄마의 패션은 지금 생각해 보면, 영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여자 주인공 니콜 키드먼의 의상과 흡사 비슷하다. 그 오래전 엄마는 항상 예뻤다.
먼저 운동장에서 동생들을 챙기고 나서 마지막으로 날 찾아오신 엄마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내게 칭찬을 쏟아부었다. 평소에 낯간지럽다고 칭찬이나 달콤한 말을 잘 못하신다던 엄마가 그날은 내게 얼마나 칭찬을 많이 해주셨는지 모른다. 엄마의 칭찬을 듣고 어쩔 줄 몰라하던 나를 보시고, 무용을 지도해 주시던 장규선 선생님이 엄마에게 다가오시더니 말씀을 건네셨다.
"은경이가 무용을 아주 잘해요. 무용을 시켜보세요. 제가 가르쳐 볼게요."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너무 감사하죠."
엄마는 어린 내게 많은 기회를 주셨다. 개인 피아노 레슨을 받게 해 주셔서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축복을 누렸던가? 그 당시에도 엄마는 내게 좋은 기회이니 열심히 해보라며 격려해 주셨다. 언제나 날 믿어주고, 기대가 크셨던 엄마다. 나는 그런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까 봐 노심초사하고, 엄마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늘 고군분투하며 달려오지 않았던가?
그날 이후, 엄마의 허락과 함께 은숙이와 나는 매일 수업이 끝나고 4학년 교실, 장규선 선생님 반에 가서 무용 연습을 했다. 은숙이는 현대 무용을, 나는 고전 무용을 배웠다. 나는 남원시 교육청 대회에 나가서 고전무용 살풀이를 공연해서 1등을 했고, 후에 전라북도 도대회를 위해 전주에 가서 장려상을 받는 특별한 기회를 선물 받았다.
그날의 그 만남, 그 시간이 내 생애에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을 내게 선물했다.
그렇게 엄마와 장규선 선생님의 대화가 끝난 후, 5학년 담임 이훈정 선생님께서 벚나무 그늘 아래에 선 엄마와 나의 다정한 투 샷을 선물로 찍어주셨다. 화가셨던 이훈정 선생님은 내게 늘 화가가 되라고 말씀하시면서 여러 미술 대회에 내 그림을 출품해서 상을 받게 해 주셨는데, 동아일보 전국 그림대회에서 금상을 받고 단상에 올라가 상장을 받던 잊지 못할 순간이 지금껏 박제된 채로 남아 있다.
지금도 이 사진을 보관하고 있다. 그때, 그날에 사진을 찍어주셨던 이훈정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이훈정 선생님과 장규선 선생님, 그 두 분을 다시 뵐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꼭 찾아뵙고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 엄마와의 소중한 추억 사진 한 장, 그 고귀한 순간을 기억으로 남길 수 있게 해 주신 고마운 선생님들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