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모삼천지교. 부모님은 유난히도 수줍음을 많이 타고 심하게 낯을 가리는 삼 남매를 위해 이사를 결정하셨다. 이대로 외딴곳, 우리들만의 세상이었던 그곳에서 자녀들을 키웠다가는 나중에 사람 구실도 제대로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우선 사람들 속에서 친구들을 사귀며 사회성을 기르도록 해주고 싶어 하셨단다. 돌아보면 신의 한 수였다. 그렇게 부모님은 늘 지혜로운 선택과 결정으로 인생을 헤쳐 나오셨다.
드디어 우리는 같은 지역이었지만, 소 씨와 장 씨, 양 씨가 군락을 이루어 사는 내동 마을 정 한가운데 마당이 넓은 집으로 입성했다. 어린 나는 이사하던 날이 기억나지 않지만, 그곳에서의 어린 시절은 내게 수많은 추억을 선물한 내 삶의 풍요로운 곳간과도 같은 소꿉친구들과의 놀이 잔치의 시작을 알린 곳이다.
내 기억에 우리 마당은 운동장처럼 넓었다. 흙마당 위에는 항상 우리들의 재미난 놀이를 위한 선이 사각형 또는 삼각형, 직선의 모양으로 그려져 있었다. 언제든 가서 뛰어놀며 규칙에 맞춰 게임을 할 수 있도록.
이 새로운 집은 내 기억 속에 더 촘촘히 남아있다. 집은 네 개의 건물이 사각형을 이루고 있었다. 중앙에는 안채가 토방의 계단을 올라가서 다시 디딤돌을 밟고 마루로 올라가야 하는 높은 곳에 근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대문에서 바라보면 맨 왼쪽으로 부엌이 있었다. 부엌 옆에는 윤기 나는 장독대가 엄마의 손길을 기다렸다. 마루를 밝고 올라가면 안방과 작은방이 미닫이문을 사이에 두고 이어져 있었다. 안방은 작은 다락이 있어서 가끔 우리의 놀이터가 되곤 했는데, 엄마한테 야단맞기 일쑤였다. 흰색 창호지가 발라진 양문에는 동그란 문고리가 하나씩 달려있었다.
안방으로 들어갔다가 미닫이문을 통과해 다시 작은방 문을 통해 나오면 술래잡기와 잡기 놀이를 하기에 딱 좋았다. 밤이 되면 마루 위 안방과 작은방 사이에는 늘 요강이 놓여있었다. 맨 오른쪽 방, 그러니까 같은 건물이지만 마루에서 내려와 걸어가서 방문 앞에 작은 반질반질한 디딤돌이 있고, 늘 하얀 고무신이 나란히 놓여 있었던 할머니 방이 있었다. 할머니 방 앞으로는 작은 보물 창고인 광이 있었고, 언제나 커다란 자물쇠로 잠겨 있어서 우리는 들어갈 수 없었다. 가끔 엄마 심부름으로 열쇠를 받아 문을 열고 광으로 들어가면 무서워서 얼른 물건을 찾아 도망치다시피 나오곤 했다. 삼촌은 결혼해서 분가하시고(친구 규연이 큰누나가 숙모가 되셨다.), 이제 할머니와 부모님, 그리고 우리 삼 남매 모두 6명이 그곳에서 삶을 꾸리기 시작했다.
안채 뒤로는 커다란 장두 감나무와 대나무 숲이 있었다. 가끔 그곳에서 대나무 죽순을 구경하곤 했는데, 엄마의 손길을 통해 어린 죽순이 반찬이 되어 밥상에 올라왔다. 가을이 되면 장두감을 따서 할머니는 껍질을 벗겨 실에 묶어 처마에 달아 놓으셨다. 우리는 달콤한 곶감 냄새가 나면 하나라도 따서 먹고 싶어 안달이 나곤 했다.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기다란 양계장이 오른쪽에 있어서 그곳엔 수많은 닭들이 꼬꼬댁 소리를 내며 먹이를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안채와 마주 보던 곳, 대문 바로 오른편으로는 창고와 화장실이 있었다. 당시만 해도 화장실은 안방에서 가장 먼 곳, 후미진 곳이었던 끝자락 귀퉁이에 자리 잡고 있어서 화장실에 가는 일 세상에서 가장 싫었다. 늘 엄마나 할머니를 붙잡고 가든지, 동생을 꼬드겨서 같이 가곤 했던 나의 험지였다.
부엌으로 올라가는 토방 계단 앞에는 커다란 수돗가가 있었고, 포도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었다. 그 옆으로는 꽃밭이 있었다. 수돗가와 장독대 사이로 올라가면 바로 옆집인 대궐 같은 승희네 마당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내가 승희랑 바로 옆집에 살게 된 것은 얼마나 운이 좋은 일이던가?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막내였던 승희는 내게 둘도 없는 소꿉놀이 친구였고, 내 여동생은 우리 소꿉놀이의 단골손님이 되곤 했다.
할머니 방 쪽으로도 담이 있어서 옆집 순금이 언니 네가 있었는데, 그쪽은 담 밑으로 왠지 잘 가지 않았다. 친구가 있었던 승희네 쪽으로 내 몸도 마음도 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아무튼, 우리 집 대문 앞에는 큰 행길이 있었다. 시내에서부터 연결되는 큰길은 마을의 시작부터 집집마다 대문을 연결해 주었는데, 길 가 오른편으로는 개울이 졸졸 소리 내어 흐르고 있었다. 우리 옆집 승희 네 집 앞은 삼거리였다. 뒷마을로 올라가는 길과 마을 앞으로 가르며 웃물로 올라가는 길이 나뉘었다. 같은 동네였지만 위치마다 이름이 따로 있었다. 강성굴, 내동 마을, 너랭이, 숨골.... 웃몰, 아랫몰... 기억이 흐릿하다.
그 삼거리가 시작되는 곳이 승희와 우리 집 근처라 그런지 우리 집 대문 앞에는 빨래터가 있었다. 우리 집 마당에도 수돗가가 있었지만, 엄마는 양은 색 하얀 빨래 담는 통에 빨래 거리를 담아 집 앞으로 가셨다. 지금으로 보면 편의시설이 좋았던 위치가 분명하다. 삼거리를 돌아가면 언제든 두부와 간식거리를 살 수 있는 영렬이 오빠네 구멍가게가 있었다. 가장 인기 있었던 건 물론 동네 어르신들의 막걸리가 아니었을까?
나는 종종 빨래터에 따라 나갔다. 엄마가 방망이를 두드리며 빨래를 하는 동안 옆에서 물놀이를 하며 놀았다. 가끔 빨래하는 흉내를 내다가 양말을 놓쳐버려 발을 동동 구르며 양말을 따라 어설픈 달리기를 했다. 작은 빨래터에는 이웃 아낙들이 각각의 빨래통을 들고 모여들었다. 개울에는 물이 시원하게 흘러내렸고, 빨래를 하기엔 더없이 깨끗한 물이었다. 누군가 처음 살던 어르신이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 놓으신 빨래터에서 대를 이어 옷을 빨고 있는 모습은 대를 이은 사랑의 손길의 산물이었다. 커다란 바위가 양옆으로 튼튼히 놓여 있었고, 두 바윗 덩이를 사이에 두고 맑은 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여인들은 평평해진 바위에 빨래를 놓고 손으로는 방망이 질을 하며, 입은 수다로 바빴다.
낯선 곳으로 이사 온 젊었던 엄마에게도 친구들을 사귈 수 있는 놀이터이기도 했을까?
나는 승희와 빨래터에서도 만나 같이 놀았다. 종종 혼자서 작은 양말을 들고나가 빨래 놀이를 하고 싶어 하던 내게 엄마는 절대 혼자 내보내지 않으셨다. 몰래 나갔다가 금세 쫓아오는 엄마 목소리에 놀라서 얼른 집으로 달려 들어오곤 했다.
빨래터는 개울가로 길에서 계단을 몇 개 내려가야만 했다. 처음 나는 혼자서 그 돌계단을 내려가지 못했다. 엄마 손을 잡고 내려갔다가 다시 엄마 손을 붙잡고서 올라와야만 했다. 그곳은 내겐 모험의 세계였다. 내려가는 길은 무서웠지만, 빨래터에 도착한 그 순간 개울의 물소리와 빨래 방망이 소리만이 귀에 가득했다. 사람들의 목소리는 커져갔다. 물소리에 맞춰서. 마치 노랫소리처럼 들려왔다. 어느새 아낙들의 말소리도 노랫가락처럼 들렸다.
봄 산에 연두핓이 피었다.
차가운 물에 손을 넣는 것이 두려워 검지 손가락만 살짝 넣다가 어느새 두 손을 다 넣어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 때론 빨래하는 엄마 옆에서 다리를 물속에 담그고 물장구를 치기도 했다. 비눗물은 빠르게 흘러내려갔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반질반질하게 매끄러운 돌의자는 햇살에 따사로이 데워져서 몸도 마음도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바쁜 엄마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 부엌에 가야만 했지만, 나는 더 있고 싶다고 조르곤 했다. 엄마의 인내심에 한계가 오면 엄마 손에 붙들려 다시 돌계단을 올라야만 했던 그 빨래터는 서서히 사람들에게 잊혀 가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엄마가 빨래터에 가면 매번 우리 동네 부자 할아버지께서 다가오셔서 엄마를 조르셨단다.
"동생 우리 주게."
할아버지께는 쌍둥이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드님이 서울에서 철도 공무원이 되어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전에 우리가 살던 곳에도 놀러 오던 기옥이 아저씨였다. 방학 때면 여고생 때부터 우리 집에 와서 우리를 돌보며 놀아주던 막내 이모를 마음에 두시고, 점찍어 두셨던 할아버지는 며느리 찾기에 돌입하셨던 게다.
그도 그럴 것이 이모는 예쁘고 키도 컸다. 부지런하고 똑똑한 건 더 말할 나위도 없었지 않은가? 이모가 방학이 끝나고 외갓집으로 돌아가는 날엔 나는 작은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이불속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울기가 일쑤였다.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소리를 죽였지만 온 식구들은 다 알고도 남았을 터다.
마침내 그 빨래터에서의 어르신의 부탁과 노력의 결실이 막내 이모의 결혼으로 이어졌다. 결국 빨래터는 사랑의 징검다리가 되었던 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