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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샨띠정 Apr 15. 2024

어린 시절 숲 속 나의 집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집

어쩌면 그곳은 작은 왕국과 같았다. 산자락 아래  논과 밭, 그리고 아버지와 삼촌이 손수 만드신 방죽과 깊은 산속 어느 곳 물줄기가 타고 내려와 산 끝이 머무는 골짜기 오른편으로 시원한 약수가 흘러내리고 있어 냉수를 선물했다. 어린 내 눈에 비친 방죽은 물이 넘실대는 커다란 호수였다. 한 번은 아기였던 막내가 혼자 기어들어가 풍덩 빠져버렸던 적도 있다. 그곳은 여름에 우리의 물놀이장이 되었다.


여고생이었던 막내 이모는 방학 때면 우리 집으로 놀러 와서 우리를 씻기고, 입히고, 먹이며, 든든한 이모이자 보모를 자청하셨는데, 방죽 옆에 있던 작은 우물가에서 막내 옥이모가 시원한 물로 머리를 감기고 씻겨주었다. 어찌나 차갑던지 지금도 오싹하다.

층층이 넓은 논과 밭을 가운데 두고 양 곁에는 반듯한 길이 맨 위, 지금은 할머니와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산 아래까지 뻗어 있었다. 길 옆으로는 나무 조경을 하셨던 아버지가 온갖 다양한 종류의 나무 묘목을 심어 재배하셨다. 단풍과 백목련, 자목련, 감나무, 앵두나무, 대추나무, 장미 등 여러 나무들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논이 끝나는 지점에는 아주 어린 시절 우리가 살던 집이 있었고, 집 옆의 넓은 텃밭에는 온갖 채소들이 건강하게 자라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다.


기다랗고 넓은 마당 앞에는 꽃밭이 있었고, 바로 아래로 작은 개울이 흘렀다. 그곳은 꼬마 삼 남매의 최애 놀이터였다. 졸졸 흐르던 개울을 사이에 두고 기다란 소나무들이 여러 그루 각각의 자리를 잡고 청청한 위엄을 자랑하며 우뚝 서 있었다. 동생들과 그 소나무 사이를 뛰어다녔다. 마당에 서 있으면 커다란 소나무 사이로 멀리 드넓은 세상이 한눈에 들어왔다.


가깝지만 가장 멀리로는 온갖 전쟁에서 치열하게 싸우던 열사들이 있던 곳, 민족 운동을 하던 이들이 몰래 숨어 역사를 기록하던 선국사가 있는 교룡산성이 우뚝 솟아 장대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곳은 동학 혁명과도 관련이 깊었다. 목숨을 걸고 기록한 동학혁명의 역사 사료가 고스란히 남겨진 곳으로 유명하다. 선국사는 우리의 소풍 명소였다.

교룡산성의 선국사

산성 아래로는 미국에서 온 보이열 선교사가 오래전에  완치된 나환자들이 생활의 터전을 삼을 수 있도록 조성해 놓은 보성 마을이 자리했다. 그리고 그곳의 가장 높은 언덕 위로 빨강 벽돌에 파랑 종탑으로 지어진 웅장한 산성교회가 온 동네를 지켜주는 양 든든히 중심을 잡았다. 교회는 처음 지어진 구교회와 새로 신축한 건물이 두 개 앞뒤로 사이좋게 나란히 한 폭의 그림이 되어 보는 이들의 마음을 평온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보성 마을과  내동 마을을 사이에 두고 기찻길이 가로질렀다. 그곳엔 작은 간이역, 산성역 역사가 작은 상자처럼 지어져 있었고, 기차 플랫폼은 세상 그 어느 곳보다도 길쭉하게  잘 정돈된 새하얀 콘크리트  위로 중간중간 놓인 작은 벤치 의자가  손님을 기다렸다. 간이역에 멈춰 서는 천천히 달리던 비둘기호 기차를 기다리던 우리 마을 승객들을 위해서.

그곳의 역장님은 내 친구 근모의 아버지셨다. 우리의 듬직한 신호수가 되어주셨고, 편안하고 안심하며 건너 다닐 수 있도록 지켜주신 분인데, 몇 해 전에 소천하셨다. 역장님의 제복과 모자, 그 얼굴이 눈에 선하다. 얼마 전에 만난 친구 근모의 얼굴에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간이역 옆으로는 이발소와 구멍가게 그리고 산성 약국이 자리하고 있었다.


간이역에서 넓고 길게 뻗은 길을 따라 내려오면 삼거리에 공적비가 있었다. 누군가의 공을 기념하던 공적비가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이정표가 되어주었고, 삶의 중심을 잡아주는 것처럼 보였다. 바로 그 삼거리는 시내로 나가는 길과 내동 마을로 들어오는 주도로였다. 내가 어렸던 그 시절엔 아마도 흙길이었을까? 콘크리트 길이었던 것 같기도 한 그 길 양옆으로 늘 여름이 지날  때면 키가 큰 코스모스가 길게 늘어서 꽃길을 만들어 주었다. 그 옆으로는 천이 흐르고 있었다.


집으로 오기 위해서는 징검다리를 건너야 했다. 자동차나 자전거, 오토바이를 타기 위해서는 돌아서 다리가 있는 곳까지 우회해야만 했는데, 줄곧 어린 나는 엄마의 품에 안겨서 졸졸 흐르는 물줄기를 내려다보며 공중에 둥둥 뜬 채로 징검다리를 건너곤 했다. 맞다, 그 당시 같이 살던 총각이었던 삼촌이 두 손으로 번쩍 들어서 건네주신 적도 많았다. 그 징검다리는 좋아하기도 했었지만, 무서웠던 곳이기도 했다. 아주 어린 시절이었기에 혼자서 다리를 벌려 팔짝 뛰면서 건넜던 기억이 별로 없다. 조금 자란 후에는 분명히 혼자 힘으로 건너곤 했을 텐데 말이다.


단단한 흙길을 걸어서 올라오다 보면 오른쪽에는 과수원이 있었다. 그곳은 어린 시절 친구였던 숙경이네 집이다. 종종 과수원에 놀러 갔다. 숙경이 할머니는 우리 할머니보다 좀 더 사나워 보여서 늘 조심해야만 했다. 그저 지레 겁을 먹은 건 아니었을까? 조금 더 올라가다 보면, 왼쪽으로 넓게 펼쳐진 서울 상회에서 운영하던 과수원을 지나고 언덕을 올라가면 마침내 우리의 놀이터였던 작은 개울이 우리를 맞이했다.

그때는 그 언덕이 어쩜 그리도 오르내리기에 높던지, 올라갈 때마다 숨을 헐떡거렸다. 성장하고 나서 그곳에 다시 가보니 그렇게 높은 경사가 아니었는데도 내 기억 속엔 높고 높은 언덕길로 남아 있다.


갓난아기인 남동생과 어린 나를 데리고 여운원 목사님을 따라 이주해 오시면서 산 아래 땅을 사서 터전을 만드셨다. 그곳에서 부모님과 할머니, 삼촌 그리고 후에 그곳에서 태어난 막냇동생 은영이까지 그곳에서 작은 세계를 이루며 살았다. 삼촌은 목사님의 중매로 작은 엄마와 결혼하여 분가하기까지 든든한 놀이 동무이자 친구였다.

나중에 듣고 보니 지금은 막내 이모부가 되신 기옥이 아저씨와 친구들, 규연이네 식구들이랑 많은 사람들이 놀러 와서 머물다 가셨던 곳이었다. 훗날 종종 그곳의 추억을 우리에게 나눠주곤 했다. 규연이의 큰 누나는 우리의 작은 엄마가 되셨다.


 집 가운데 중앙에는 큰 부엌이 있었고, 양옆으로 방이 하나씩 있었다. 맨 오른쪽에는 창고가 있었는데, 온갖 것이 다 집합되어 보물 창고와도 같았다. 부엌과 두 방은 앞뒤로 문이 다 있어서 뒷문으로도 드나들 수 있었으며, 뒷문을 열어 두면 산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온 방안을 선선하게 식혀줬다. 뒷문을 열어 놓고 방에 누워있으면, 선풍기도 필요치 않았다. 겨울에는 부엌이 우리의 목욕탕이 되었다.  엄마는 부엌에서 물을 끓여 커다란 고무 통에 적당히 따뜻하게 채운 다음 삼 남매를 차례로 불러 고무 통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공기는 차가웠지만, 몸은 너무나 따스했던 그 컴컴한 밤의 부엌에서 엄마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집 마당 오른편에는 염소를 키우던 작은 오두막이 있었다. 젖이 부족했던 엄마는 염소젖을 짜서 꼬맹이들의 배를 채우셨단다.  메리라고 불렀던 누렁이 강아지가 같이 살며 다정한 친구가 되었고, 염소도 삼 남매에게  진한 우유를 제공하던 양 엄마로 제 몫을 다하고 있었다.              


낯가림이 심하고, 사람들을 만나면 울기가 일쑤고, 말도 제대로 못 하던 우리 삼 남매를 위해 마을 한가운데로 이사하기로 결심하신 부모님을 따라 이사하기 전까지 우리는 그곳에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낯을 가리던 아이들이었지만, 우리끼리는 깔깔거리며 맘껏 웃고 떠들며 놀았던 그곳은 보물 창고이자 작은 천국이었다.


나는 지금도 종종 그곳을 꿈속에서 만난다.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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