꽉 채워야만 좋은 것이 아님을 안다. 빈칸 하나쯤 있어야 조금 가볍고 홀가분하기도 하며, 여백을 통한 숨 고르기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작은 빈칸이 생기면 안절부절못하며 가슴을 조여 오는 압박감이나 초조함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게 된다. 삶의 균형과 중심을 잡는 것도 어지간한 신념과 훈련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순간에 와르르 휘청거리며 무너지기 쉽다. 내게 자꾸 빈칸이 생겨난다. 그 빈칸을 어떻게 해야 할까? 잠에서 깨어 문득 생각에 빠진다. 분명히 늦게 마신 커피 탓이다. 거기에다 인도에서 들려온 믿기지 않는 끔찍하고 안타까운 소식이 잠 못 이루게 한다. 눈만 감고 생각의 무한 공간에서 헤매다가, 모두가 잠든 깊은 밤에 나의 모자란 공간을 글로 채워본다. 나는 뭔가에 몰두하다 보면, 아이와 집안일에 소홀해지곤 한다. 물론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영성 생활도 마찬가지다. 더 기도해야 하는데... 두 돌에 인도에 간 딸아이가 역 타문화권인 한국에 만 11살이 되어 돌아왔다. 아이마다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어떤 아이들은 조금 더 속도가 빠르고 또 조금은 늦을 수도 있다. 그렇게 나는 우리 딸아이의 속도에 맞춰 조금 천천히 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꾸 반 칸이 많아진다. 가끔 스스로 자책을 하며 그 빈칸이 모조리 내 탓인 거 같아 눈물이 날 때도 있지만, 나는 다시 숨 고르기를 하곤 한다. 샤이니는 토끼를 기르고 싶어 했다. 장군이와 꽃순이가 슬퍼하지 않겠냐고 회유하며 피해보려고 했는데, 오늘 마음을 정했다. 초등학교 마지막 학년을 보내고 있는 샤이니가 중학교에 가서도 그대로 토끼한테 관심을 가지고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딸아이에게 소원 들어주기로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시골 찬스를 주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동네 어르신이 며칠 전부터 집에 토끼가 있다고 한 쌍을 주시겠다고 하셔서, 일단 오후에 샤이니와 토끼 구경을 갔다.
마당에 들어 선 딸이 토끼를 보더니 환호성을 지르며 야단이 났다. 우리 집엔 아직 토끼집이 없는데, 샤이니는 오늘 당장 데려오지 않으면 병이라도 날 것처럼 보였다. 일단 샤이니가 토끼 먹이 주는 담당을 하기로 약속하고 집으로 데려오기로 했다. 어르신도 토끼를 박스에 두고 있다가 천천히 토끼집을 장만하라시면서, 토끼 한 쌍을 종이 박스에 담아주셨다. 흰색은 암 컷, 짙은 회색은 수컷이었다.
토끼를 차에 싣고, 바로 철물점을 향해서 토끼집 준비를 서둘렀다. 나는 철물점에서 아이디어를 총동원해 재료를 사 와 텃밭 옆에 셀프 토끼집을 만들기 시작했다.
집에서 동물들, 그러니까 애완동물을 키우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남편은 적어도 갑의 위치에 있고, 샤이니와 나는 을의 입장에 있다. 남편에게 토끼집을 만들어달라고 하면, 토끼를 키우지 말라고 할 게 분명했기에 나 혼자서 간단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샤이니는 하얀 토끼 귀를 잡고(어르신께 배웠다.) 앞집이며 옆집에 토끼를 소개하며 다니느라 시끌벅적한 틈을 타 나는 최대한 손을 빨리 움직여 토끼집을 거의 완성해가고 있을 무렵, 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토끼가 탈출했어." "진짜? 어디로 갔지?" 샤이니가 흰색 토끼 귀를 잡고 이리저리 다니는 틈에 회색 토끼가 잽싸게 도망을 친 모양이다. 둘이서 토끼를 찾아 나섰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샤이니가 꽃순이를 데리고 가서 찾아보라고 했더니, 꽃순이는 개구리만 쫓아다니느라 토끼를 못 찾았다. 장군이를 데려와 먼저 종이 박스에서 토끼 냄새를 맡게 한 후에 토끼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말았다. 이미 어딘가로 멀리 달아난 게 분명했다. 과연 토끼에게 안전 한 안식처는 어디일까?
눈물이 글썽글썽한 샤이니가 연거푸 미안하다고 하더니, "엄마, 그냥 우리 토끼에게 자유, 프리덤 주자." "그래? 괜찮겠어?" "응, 산에서 사는 산토끼도 있대." 그렇게 자유를 찾아 떠난 수컷을 보내고 흰색 암컷 한 마리만 남게 되었다. 쓸쓸해 보이는 약한 토끼 한 마리가 낯선 곳에서 캄캄한 밤을 혼자서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에 걸린다. 대신 내일은 예쁜 이름을 지어주기로 하고, 토닥거려주고 홀로 토끼집 안에 남겨 두었다.
그렇게 새 식구를 맞이한 날 밤에, 나는 불현듯 몰려오는 딸아이의 수학과 한국어의 빈칸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나마 영어라도 잊어버리지 않고 잘해주길 바라지만, 이젠 영어도 한국어도 둘 다 빈칸이 넓어졌다. 느리게 그리고 천천히 가는 이 순간을 귀하게 여기는 감사하는 마음속에서도, 살짝궁 자리 잡고 있는 빈칸에 대한 두려움을 잘 극복하며 이겨낼 수 있으면 좋겠다. 그 와중에 새끼 제비들은 하루가 다르게 날개가 커지고, 부리가 나오며, 이제 아기 목소리까지도 들린다. 아기 제비 합창단이 결성된 것처럼 하루 종일 노래를 부른다. 이제 6마리 아기 제비들에게는 점점 둥지가 비좁아 보인다.
우리 딸도 어느덧 내 키만큼 자랐다. 이토록 예쁘게 잘 자란 딸이 곁에 있어서, 나는 참 행복한 엄마다. 기억하리라. 이 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