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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비 Oct 27. 2020

크리스마스의 일기.

소설이라 해도 될까?

크리스마스이브의 이브.     


설렘이 가득한 거리는 나와는 인연이 없다. 이미 텅 빈 사무실에서 커피믹스를 채운 종이컵을 감싸 쥐고 번쩍거리는 거리를 내려다본다. 아마 어딘가의 누구도 나처럼 불 꺼진 사무실에서 이 풍경을 보고 있지 않을까. 처음 겪는 일도 아니지만, 연말의 분위기는 어딘가 마음 한구석을 꼭 쥐고 흔들어댄다. 나는 종교도 없는데...     


자정을 넘겼으니, 사실상 크리스마스이브다. 조촐하게 캔맥주에 과자 한 봉지를 들고 한참을 걸어 집 문을 열고 들어선다. 평소 인터넷으로 보던 와인을 사 올까 했지만, 가스비를 생각하면 살짝 조심스러웠다. 언뜻 보물이라도 있지 않을까 착각하게 만드는, 오래된 현관문을 비틀어 연다. 인근 월세보다 저렴한 대신 유흥가가 길목에 있는 탓에 길보다 낮게 파묻힌 나의 보금자리는  거리의 조명이 넘쳐흐른다. 마치 무슨 파티룸이라도 된 것처럼...      

샤워를 마치고, 네온사인의 조각 빛이 흐르는 창가에 큼지막한 성탄절용 양말을 걸어둔다. 촌스러운 벽지 위에도 존재감이 확실한 녀석이다. 산타가 없다는 건 이미 오래전에 알았지만, 이상하게도 양말은 매년 의식처럼 찾아서 걸게 된다. 유일한 장식이기도 하고, 마음 편히 누릴 수 있는 설렘 같은 것.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관통하는 나의 메마른 삶에 단 하나의 유흥이었다.     


등으로 스며드는 싸늘한 벽과 이불에 파묻어 훈훈한 다리. 피로감이 잔뜩 쌓인 몸에 서늘한 맥주가 들어가니 눈이 어지러울 만큼의 조명도 마다하고 잠이 솔솔 올라온다. 내일은 쉬는 날이니까. 좀처럼 길게 잠들지 못해 알람보다도 일찍 깨지만, 예수님 태어나신 날만큼은 세상모르고 푹 자보고 싶다. 앉은자리 그대로 모서리에 모로 눕는다. 벽 속에 파고들려는 기세로 몸을 웅크리고, 잠으로 빠져든다.     


#


"아빠! 싼타 할부지 왔다 갔어!!"


아직 잠이 덜 깬 엄마 아빠의 침대로, 오누이는 산타클로스가 주고 간 듯한 선물 포장을 안고 뛰어들었다.


"어이쿠! 우리 딸 큰 거 받았네!"

"나두 나두!"

"그래! 우리 아들도 큼지막한 거 받았구나!"

"꺄아아아!"


아직 눈도 제대로 못 뜬 아빠는 잠긴 목소리로 나와 남동생에게 동조하느라 애썼고, 엄마는 일찌감치 일어나 부엌에서 우리를 보며 입가에 미소를 가득 머금었다.


"빨리 인나! 선물 뜯어도 돼??"

"그래- 선물 뜯어보자! 우리 아들딸. 엄마 아빠 말 잘 들어서 산타 할아버지가 큰 거 주고 가셨네!"


아빠는 반강제로 침대에서 끌려 나왔다. 목청껏 소리를 지르며 뛰는 나와 동생에게 둘러싸인 채, 머리에 까치집을 지은 아빠는 우람한 팔로 힘차게 선물을 뜯었다. 나는 곰 인형, 동생은 로봇이었다. 온 집안이 환하게 빛이 났다. 아마 눈이 내리고 있었던 걸까. 한참을 뒤에나 알아챌 나의 산타는 나와 동생의 얼굴에 까칠한 수염을 비비며 웃었다.     


#


손때가 잔뜩 탄 곰 인형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왠지 모르게 측은한 표정이다. 그럴 리가 없는데... 잠들기 전의 바람이 무색하게, 아직 해가 다 뜨기도 전에 눈이 떠진다. 조금은 억울한 마음에 누운 채로 방안을 쓱 둘러본다.     


깨자마자 눈이 마주친 오래된 곰 인형.

어제 먹다 잠든 맥주 캔과 과자.

꺼지지 않은 티브이.

방안을 온통 뒤덮고 있는 꽃무늬 벽지.

그리고 밤새 축 늘어진, 벽에 걸린 양말.   

  

아직도 파티가 이어지는 팀이 있는지, 저 멀리서 누군가 소리를 지른다. 체력도 좋지, 그야말로 밤새 달린 모양이다. 계획 같은 건 딱히 없지만, 더 누워있어도 잠이 올 리가 없었기에 몸을 일으킨다.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맥주캔과 과자봉지를 치운다. 어제 차마 걸지 않았던 외투며 옷가지도 제자리를 찾아준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이미 오래전부터 몸에 밴 행동이자 역할이었다. 오히려 치우지 않으면 조금 불안할 정도. 그래도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아버지를 떠나 독립을 한 건 몇 안 되는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그곳을 벗어나지 못했다면, 진작에 엄마를 따라갔을지도 모를 일이지. 밖에서 견디는 부당함과 모진 말, 삼촌뻘 되는 팀장들의 저질스러운 농담과 시선. 빠듯한 살림에서 오는 압박감. 그 무엇도 아버지보단 견딜 만했다. 되새겨봐도 잘한 일이었다. 그래도 나는 직장이라도 있잖아. 가끔 연락하는 친구들이나 또래의 취준생들을 볼 때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운이 좋았던 거야 나는... 버릇처럼 떠올리는 생각이다.  

    

메시지 수신을 알리는 잔잔한 벨 소리가 들린다. 이 시간에? 뭔가 광고 따위가 날아들었으려니... 하던 일을 놓지 않는데, 재촉하듯 이어서 소리가 울린다. 호기심보단 질척거림이 싫어 알림을 끄려고 휴대폰을 든다.    

  

‘아버지 쓰러졌대.’


동생이 문자를 보냈다.     


#     


한껏 졸음과 짜증을 섞어 새벽닭처럼 울어대는 전화를 받았다. 간략한 신원을 확인하고 아버지가 쓰러져 병원에 있다는 연락을 전해 들었다. 매번 패턴을 잊어, 잠금도 걸지 않은 전화에 내 번호가 있었단다. 안 그래도 요 며칠은 아버지랑 통화가 되지 않아 신경이 조금 쓰였는데 이런 이벤트를 준비했었나. 전화기 저편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당황하는 게 느껴질 만큼, 나는 필요 이상으로 차분하고 냉정했다. 아마 어렴풋이 이런 날을 짐작하고 있었던 걸까. 환자의 상태를 물으며 호들갑을 떨기보다는 병원 위치를 문자로 남겨주십사 요청하고 빠르게 통화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동안은 궁금하지도 않았던 누나에게 문자를 남겼다.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뒤에 붙이기엔 내용이 좀 그러니까. 그냥 긴급 소식만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오늘도 일을 나갔어야 했기에 잠을 조금 빼앗긴 건 서운하지 않았다. 어쨌든 성수기라 바쁜 가게로 전화를 건다. 식자재를 받던 주방 사수는 의외로 걱정을 해주며 흔쾌히 월차를 받아주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부지런하다. 일반적인 출근 시간이 한참 전인데도 지하철엔 제법 사람들이 들어차 있다. 주로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인데 간혹 진중하게 차려입은 분들도 계시지만, 보통은 같은 회사에서 만들었다고 의심되는 비슷한 옷들을 입고 계신다. 크리스마스의 화사함은 아마 이분들과는 인연이 없겠지. 잘 알지도 못하는 외국인의 생일이 뭐 그리 대단할까. 나도 비슷한 생각이다.     


병원은 언제나 무거운 공기가 흐른다. 아무리 크고 화사한 병원일지라도, 생명에 크고 작은 위협을 당한 사람들이 모인 곳은 설명할 수 없는 답답한 기운이 가득 차 있다. 그 답답함이 피부에 닿는 게 느껴져 조금 버거울 정도다. 어쨌든, 이런 화사한 병원은 아버지와 어울리지 않아. 좀 더 침울하고 어두운 병원을 상상했는데...     


누나가 도착하려면 못해도 두세 시간은 있어야 하겠지. 거의 일 년 만에 누나에게 보낸 메시지가 이런 내용이라니...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뒤적이다 출발하면서 누나에게 보낸 메시지를 다시 보고 있다. 딱 일 년 만에 보낸 문자였다. 새벽같이 보낸 문자 위로 작년 크리스마스에 ‘메리 크리스마스. 잘 지내지?’라고 적힌 문구가 보인다. 누나는 그때도 지금도 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오기는 하겠지. 근거 없는 믿음은 뚜렷했으나, 하릴없이 밖에서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먼저 아버지를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병원의 공기가 무겁다고 말했던가? 중환자실은 다른 곳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무게감이었다. 온몸에 선을 연결하고 링거를 매단 사람들이 듬성 누워있고, 간혹 보이는 보호자나 병원 관계자 그 누구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삐빅- 쉬익- 거리는 기계음이 일정하게 리듬을 만들며 적막 속에 미치지 않도록 도와주었다. 그중에는 아주 작은 아이도 있었다. 정말이지 보는 것 자체가 괴로울 지경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누워있었다. 차라리 아이를 보는 것보단 마음이 편했다.     


악마를 잡아 묶어두었다면 저런 모습일까. 피골이 상접한, 내 두려움의 근원인 아버지가 기계의 도움으로 간신히 숨만 붙어있었다. 살리겠다고 달아둔 이런저런 선들이 마치 포승줄로 묶어둔 느낌이었다. 오래 두고 볼만한 광경은 아닌지라 아직 숨이 붙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근데 저 아이는 괜찮으려나... 부모가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전해 들은 말로는 고시원 관리인이 청소 중에 아버지가 있던 방에서 쿵 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평소엔 조용한 편이었는지 그 소리 자체가 관리인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바닥에 쓰러져있는 아버지를 발견했다고 한다. 아마 내게 전화를 건 사람도 동일 인물이겠지. 아버지가 쓰러진 원인은 어찌 됐든 뇌혈관의 문제인데 수술을 해도 깨어날 확률은 높지 않다고 했다. 이런저런 소견을 남기는 의사는 자동응답기처럼 예상한 지점에서 정확히 머뭇거렸고 자리를 뜨면서는 난처함과 안타까움을 표했다. 어찌나 빤히 보이는지 마지막 멘트는 머릿속으로 정확히 맞추기도 했다. 복잡한 해설이나 주석은 다 떼어내고 결국 문제는 돈이었다. 수술비가 엄두도 못 낼 금액임은 물론이고, 확률 또한 도박이었다.      


‘장례는 어떻게 한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를 떠올렸다가, 복도 끝에 서 있는 누나를 보고 정신이 들었다.   

  

#     


“수술하자, 아버지.”     


별다른 안부 인사도 없이 줄에 묶인 아버지를 멍하니 보던 누나의 첫마디였다. 무엇보다, 그 말이 누나의 입에서 나왔다는 건 상당한 충격이었다. 굳이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진심이야 누나?”

“... 무슨 소리야. 당연히 수술해야지.”

“아니, 그렇긴 한데...”

“내가 방을 빼면 돼. 돈 걱정은 하지 마.”

“뭐?”

“부족한 건 뭐...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아직 한 번도 누나의 집에 가본 적은 없지만, 근 10년 전에 집을 떠나면서 언뜻 본 누나의 미소가 머릿속에 스쳤다. 그 미소가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게 할 만큼 화사했던 게 아직도 생생한데, 그런 누나가 집을 팔겠다니... 아버지를 견디지 못해 죽은 사람처럼 일만 해서 겨우 마련한 보금자리를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팔겠다니... 장례 준비를 걱정하던 것이 조금 수치스러웠다. 그런데도 저 깊은 곳에서 누나를 만류하고자 하는 마음이 계속해서 흘러넘쳤다.     


“확률이 반도 안 된대. 그 돈을 다 쓰고도, 산송장일 수 있다는 거지... 의사 만나서 직접 듣고 다시 생각해봐. 자식이면 당연히  수술해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아버지잖아? 우리 아버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잖아?”

“....”

“... 감당할 수 있어?”

“... 모르겠어. 나도.”     


누나는 대답하면서 고개를 한 번도 들지 않았다. 반대로 내 눈은 허공을 향해 내려올 줄 몰랐다. 이쯤에서 끝내고 싶은 것은 나뿐이었나. 하긴, 누나는 집을 나가고 한 번도 아버지와 연락을 한 적이 없으니... 어느 정도 연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이 모든 것을 누나를 핑계로 끝내고 싶었는지도...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이 이상 누나의 결심을 만류하면 천하에 없는 개자식이 되는 기분이라 말을 멈췄다.     


#     


“뭐야. 결국 나만 나쁜 새끼였구나.”     


허공에 중얼거리는 동생의 읊조림에 동의하지 않았다. 사실 나쁜 건 아버지였지. 너나 나는 죄가 없단다.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문자를 받자마자 마음이 움직였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 마음이 열렸다거나, 용서했다거나, 슬펐다거나. 그런 느낌은 아니었다. 10년 만에 나는 피하거나 숨지 않고 아버지를 향했다. 생각해보면, 굳이 아버지가 나를 찾지 않아서 그랬을 뿐, 다른 일로 나를 찾았어도 나는 움직이지 않았을까? 왠지 그런 기분이 들었다.      


“아직 아침 안 먹었지? 우선 밥이나 먹자.”     


동생의 제안으로 우린 병원 근처에 아침 식사가 되는 국밥집으로 들어갔다. 보조 요리사로 일하고 있는 동생은 직업 탓인지, 먹는 모습도 복스럽게 보였다. 오누이가 마주하고 밥을 먹는 게 얼마 만인지... 드라마에서 보던 머슴처럼 밥을 먹는 동생을 보면서 어린 시절의 모습이 잠시 겹쳐 보였다.     

 

“... 누나 마음 굳힌 거지?”     


이런저런 소견을 남기는 의사의 모습을 보며 조금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의사라는 직업은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라, 매번 안타까운 척 연기해야 하는 게 아닐까? 어려운 설명보단 뇌혈관의 문제라는 것과 수술비만 기억에 남았다. 동생은 병원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자판기 커피를 쥐고 앉아 담배를 태웠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어.”

“그러게, 나도 내가 이런 소릴 할 줄은 몰랐네.”

“....”

“....”

“.... 그래서 잘 지내고 있는 거지?”     


침묵의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고 동생이 물었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도 그랬던 것 같다. 아니, 그와는 관계없이 무려 십여 년만의 대화가 아닌가. 아주 가끔 서로 안부를 전했던 거 같지만, 주로 동생이 열 번을 물으면 내가 한두 번 답하는 모양새였다.     


“그냥 그렇지. 일하고 뭐...”

“누구 만나는 사람은 있고?”     


그럴 리가 있나. 하지만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진 않았다. 그리고 아마 거의 처음으로 나도 안부를 물었다.     


“그러는 너는 어때? 별일 없어?”

“나야 남들 놀 때 일하는 직업이잖아. 뭐, 칼 만지고 고기 써는 일이라 굶을 일은 없어.”   

  

이 녀석이 이렇게 능글거리던 성격이었나.      


“아무튼 누나 맘이 그렇다면, 방법을 찾아보자. 포기하는 거면 모를까. 누나 혼자 독박 쓰게 할 순 없지.”

“무리하지 마. 나야 있는 보증금 쓰는 거니까.”

“그 정도면 전부 갈아 넣는 거잖아... 아버지 싫다고 악착같이 도망치고선...”

“....”

“일단 오늘은 내가 있을게. 둘 다 계속 있을 필요 없으니까.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차차 얘기해보고...”

“그래. 그러자. 아무튼 돈은 너무 걱정하지 마.”

“아 됐어! 내가 지금 돈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잖아!!”     


잘못 건드린 벌집처럼, 동생은 순식간에 분위기를 바꿔 소리를 내질렀다. 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의 깊은 정적이 순식간에 나와 동생의 사이를 갈랐다.      


“... 미안해해야 하는 거니? 내가?”     


동생은 대답 대신 새 담배를 물었다. 내 손에 들려있는 커피가 묘한 무늬를 그리며 컵 안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사실 나는 별로 살리고 싶지가 않다. 매일 전화로 싸우는 것도 지치고, 술 처먹고 사고 친 거 수습하는 것도 지겨워. 술 깨서 미안하다고 우는 꼴도 이골이 난다. 저 인간이 나나 누나한테 했던 짓거리 생각하면 사실 지금도 이가 갈려. 누나는 도망이라도 쳤지. 난 왜 병신같이!....”     


십 년 전에 도망친 게 내가 아니라 동생이었다면, 말하는 자리가 바뀌었겠지. 잔뜩 흔들어 둔 콜라의 마개를 연 것처럼, 동생은 원망과 분노를 시원하게 뿜어냈다. 아마 내가 떠나고 가장 허무하고 외로웠을 사람은 동생이 아니었을까? 막막한 얼굴로 점점 멀어지는 집 현관에서부터 동생은 한 번도 나를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아마 눈덩이처럼 불어난 이자까지 포함해서, 이제야 내게 돌려주는 것이겠지. 동생이 쏟아내는 묵힌 감정들을 흘리지 않고 받으려 집중했다. 이 정도는 받아주어야 하지 않겠나. 그래도 엄마 얘기는 꺼내지 않는 동생이 조금 기특했다.      


그래, 엄마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     


한 번 터진 입은 한동안 멈추질 않았다. 누나는 묵묵히 커피잔을 보고 있었고, 나는 며칠 만에 화장실을 찾은 사람처럼 거침없이 말을 뱉었다. 이렇게 쌓인 게 많았었나 싶을 만큼 쏟아내니, 끝에는 너무했나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누나는 내 말을 한 번도 자르지 않았다.     


다시 한번 정적이 찾아왔다. 빌어먹을 의료기기의 소음이 간절할 만큼 정적은 길고 짙었다. 오히려 터뜨린 사람은 나인데, 후련하다는 표정은 누나의 얼굴에 비추었다. 다시 우리의 눈이 마주쳤을 때, 누나는 내 기억 아주 깊은 곳에 덮어둔, 엄마와 닳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그리고 미안해. OO야.”    

 

누나가 내 이름을 불렀고, 눈에서 무언가 밀려 나오는 걸 막지 못해 나는 몸을 슬쩍 돌렸다.     

 

구름이 잔뜩 드리운 날. 흐리다기보단 하얀 날이었다. 누나는 급할 때 쓰라며 언제 준비했는지 오만 원짜리 몇 장을 손에 쥐여주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마 조만간 다시 볼 무렵엔 두툼한 봉투로 바꾼 집을 손에 들고 오겠지. 나는 의사를 찾아가 수술 동의서에 서명했고, 그날 저녁 우리의 악마는 수술실로 들어갔다.   

   

가게는 당분간 나가지 못하게 되겠지. 아마 간병인도 좀 알아봐야 할 것이고, 의사 말처럼 수술 후에도 장애가 남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연금 같은 건 좀 나오려나. 아버지 고시원에는 짐이 얼마나 있겠어? 어쨌든 지금 지내고 있는 집에서 아버지와 지내야 하겠지. 누나는 어디서 지내려는 걸까? 어쨌든 집으로 들어오지 않을까? 세 사람이 살기엔 비좁기도 하고... 여자니까 방도 따로 하나 있어야 할 텐데... 아직 닥쳐오지 않았으나, 내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생각이 멈출 무렵엔 누나가 미안하다고 한 말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     


집주인과 부동산엔 연휴가 끝나고 말해야 하겠지. 당장 나갈 것도 아니었는데, 집에 들어오자마자 급한 짐들을 작은 캐리어에 차곡차곡 넣었다. 문득, 다시 생각해보라는 동생의 말이 떠올랐다. 아버지에게 당했던 모진 일들과 미워하는 마음은 제쳐두고서라도 더 생각할 것이 없었다. 마치 모든 게 그렇게 정해진 것처럼. 그러면서도 왜 자신이 그런 마음을 먹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앞으로의 일은 다시 생각하고 마주하자. 지금 당장 머리를 움켜쥐어봤자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다.      


현관 옆에 꼼꼼하게 담은 캐리어를 다소곳이 붙여놓는다. 고개를 돌려 방안을 훑어보는데, 마치 새로 집에 들어왔던 그 날처럼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어젯밤에 걸어놓은 낡은 크리스마스용 양말이 눈에 들어왔다.     

‘아, 그랬구나.’     


자신도 알지 못했던 결정의 이유를 찾았다. 왜 하필 아버지가 지금 쓰러졌는지, 하필 그날 꿈에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 펼쳐졌는지, 그랬던 사람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필사적으로 마련한 집을 단번에 처분할 마음이 들었는지, 동생과 밥을 먹고, 그런 동생 뱉어낸 응어리를 담담하게 주워 담았는지.      


크리스마스. 다른 이유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납득해버렸다.    

 

자리를 펴고 눕는다. 아직 잠들기엔 좀 이른 시간이지만, 아무래도 작지 않은 일을 지나온 하루라 지친 모양이다. 아마 정말 오랜만에 깊게, 아주 깊게 잠이 들었던 날이었으리라.   

   

자정을 넘겼으니, 크리스마스다.     


###


장례식엔 사람이 거의 오지 않았다. 몇 안 되게 교류하던 회사 동료와 친구들. 동생의 주방 식구들 정도. 그마저도 각자가 어쩔 수 없이 삶의 교전지에서 잠시 이탈해야 했기에, 소식을 알게 된 사람들이 왔을 뿐. 그 외의 사람들은 일절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 동생이 일하던 가게의 사장님이 보내 준 화환 하나가 식장 입구에서 장례가 치러지고 있음을 표했다.      


수술 자체는 크게 문제가 없었던 것 같은데, 어쨌든 명줄이 거기까지였던 모양이다. 정작 아버지를 보내려고 마음먹었던 동생은 눈물을 보였지만, 집을 팔아 아버지에게 선물했던 나는 썩 눈물은 나지 않았다. 집이 아깝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또 이런 일이 찾아왔고, 담담하게 받아들일 뿐이다.      


매우 조촐한 장례를 마치고 싸구려 합판으로 만들어진 분골함에 아버지를 담았다. 화장터에서 동생의 집으로 향하는 택시 안은 정적으로 가득했다. 동생은 퉁퉁 부은 눈으로 안고 있는 아버지의 분골함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교외 경치에 마음을 빼앗겨 창밖을 바라봤다.      


아버지를 방 한편에 모셔두고 동생과 나는 잠시 눈을 붙였다. 잠에서 깼을 땐 이미 해가 진 뒤였는데, 둘 다 왠지 모르게 허기를 느껴 근처 국밥집을 향했다.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반찬으로 나온 풋고추가 너무 매워 한참을 콜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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