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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살 Feb 04. 2022

최유진 말고 준유진 할래요


며칠 전에 "최선을 다해" 휴식을 취하기 위해 강남의 한 테라피샵에 스파를 예약했다. 80분 마사지를 받는데 9만 원의 비용은 과하고,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요즘 피로가 누적되었는지 몸 여기저기가 아팠다. 잠을 충분히 잤는데도 잠이 쏟아졌다.


나는 "최선을 다해" 돈을 벌고, 번 돈은 "최선을 다해" 아끼는 사람이다. 대학생 신분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시간도, 할 수 있는 일도 한정적이지만 나는 한정된 시간에 최대한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도전해왔다. 시급을 몸값으로 여기며 한 시간에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찾아 헤맸다. 그 세월만 삼 년이다.


태국에 여행을 갔을 때도 나는 돈을 아끼기 위해 매일 야시장에서 500원짜리 초밥을 사 먹었고, 이틀에 한 번씩 배탈이 나곤 했다. 나는 종종 돈 앞에 미련하다. 하지만 돈이 없어 느끼는 불안감보다 끔찍한 건 없다. 그래서 악착같이 벌고, 악착같이 아꼈다.


하지만 나는 태국 여행을 갔을 때 한 달에 한 번씩 마사지를 받으러 갔다. 마사지를 받는 일이 좋아서, 그게 포기가 안 됐던 게 아니다. 나는 휴식에도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그동안 못 잔 잠만큼, 그동안 누리지 못한 쉼만큼, 80분 안에 다 보상받을 수 있다면 9만 원 정도는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일상적으로 가성비를 따졌고, 가성비를 무너뜨릴 만큼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나에게 최선을 다하는 일만큼 쉬운 일은 없다. "최유진"의 "최"는 최선의 "최"인지 모른다.

최선을 다하면 변명하기 유리하다.


"나는 저엉말 최선을 다했는데 일이 이렇게 흘렀어요. 도대체 왜 그럴까요. 난 정말이지 최선을 다했는데."


하지만 최선을 다했다고 변명하고 싶지 않은 순간도 있다. 내 한계를 마주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럴 때 나는 그냥 이렇게 말해 버린다.


"사실 그렇게 절실하지 않았어요."






문보영 시인의 <준최선의 롱런>을 읽고, 최선에는 정도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준최선의 롱런>의 요지는 준최선만 다하고 살면 롱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의 모든 문장에 공감했다. 왜냐하면 나도 삶보다는 준삶을 살고 싶기 때문이다. 인간보다는 준인간이고 싶고, 최유진보다는 준유진이고 싶다.


하지만 최선도, 준최선도 너무 추상적이기 때문에 가늠이 안 된다. 나에게 문보영 시인의 삶이란 최선의 삶이다. 일기도 매일 쓰고, 브이로그도 만들고, 창작도 하는 삶이란. 젊은 나이에 몇 권의 책을 낸 삶이란. 나에게 최선 중 최선이다.


결국 최선은 기분의 문제라는 생각을 한다. 결과가 성공이면 무조건 최선을 다한 게 된다. 그리고 결과가 망하면 내 마음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한다. 결과가 망했고, 그래서 너무 슬프면 내가 아무리 최선을 다한 일도 최선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만다. 너무 슬픈 결말은 최선을 최선이 아니게 만든다.






요즘 나는 어김없이 최선을 다한다. 무엇에 최선을 다하느냐면 취준생으로서 최선을 다한다. 올해에 졸업을 한다면, 내년에는 취업하게 되기 때문이다.


취준생으로 최선을 다하기 전에는 소설가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은 내게 최초로 찾아온 최선 동력이었다. 그 마음이 소중하여 5년 동안 내 마음을 꽉 붙들고 있었다.


한편 나는 소설가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소설가가 되려면 오랜 시간 숙성된 괴로움이 필요했는데 나는 항복 선언을 했다. 괴로운 게 지겨웠기 때문이다. 나는 소설가가 되는 대신 '잘 사는 삶'을 살기를 택했다. '잘사는 삶'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소설가가 되면 결코 잘 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잘 사는 삶'이 뭔지 답을 찾기 위해 남들을 관찰했다. 얼핏 '잘 사는 삶'을 사는 이들은 직업이 있고, 돈을 번다. 그들은 종종 오마카세를 사 먹고, 러쉬에서 소중한 이의 선물을 사고, 한 달에 한 번 호캉스를 가고, cos에서 겨울에 입을 두 벌의 코트를 산다. 최선을 다하면 나에게 그런 자본적 특혜를 누릴 기회가 찾아올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잘 사는 삶'을 위해 취준생으로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지금 최선을 다해 벌고, 아낀 돈으로 스파를 받으러 왔다. 발마시를 받고, 은은한 라벤더 향이 감도는 방안에서 전신 오일 마사지를 받았다. 나는 마사지를 받으며 끊임없이 "최선을 다한다"는 말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최선을 다해 쉬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이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 글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80분 남짓의 시간 동안 마사지를 받으며 내 몸의 소리에 집중하는 대신 끊임없이 머리를 굴렸다. 최선을 다해 쉬는 일에 완전히 실패해 버렸다.


최선을 다해 쉬는 일이란 최선에 대한 생각은 일절 멈추고, 생각을 비우고, 온종일 잠을 자는 것이다. 그것이 최선을 다해 쉬는 일이다.


나의 최선은 이렇게 빗나간다. 최선을 다해도 내 뜻대로 안 되는 일이 점점 늘어난다. 최선을 다한다는 말만큼 이상한 말이 없다. 어쩌면 나는 최선의 굴레에서, 점점 꽉 막힌 사람이 되는지 모르겠다.


요즘 나는 최선을 다하는 대신 오기를 부리고 있었다. 아무도 저당잡지 않은 내일의 나를 스스로 옥죄고, 남들과 같은 길을 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최선은 기분의 문제다. 이런 기분으로는 성공적 결과를 맞아도 이건 최선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말 것이다.


최선 중독자는 하루아침에 최선을 다하는 삶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래도 나는 이제 조금 다른 일들에 최선을 다해보기로 한다. 이를테면 샤워하기, 신발 신기, 옆집 사람에게 인사하기, 생산적이지 않은 일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나는 진정 '나의 삶' 그 자체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될지 모른다.


내일부턴 꼭 준유진이 되겠다는 다짐을 9만 원 스파를 받으며 한다. 그래, 어쩌면 9만 원 스파의 가성비는 충분하다. 최선을 다하는 일에 대한 생각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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