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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yong Sep 11. 2015

그때의 너를 좋아한다.

#4 막스자콥 <지평선>


지평선 / 막스자콥

그녀의 하얀 팔이
내 지평선의 전부였다


이 짧은 문장이 상기시키는 정서는

눈에 보이듯 선명하다.


그 하이얀 팔에 설레었고, 네 모습에서 세상을 보았을 때.

네가 내 세계이고, 세상이  너였을 때.

네가 내 전부였을 때.

그리고 이 도취상태를 안타깝게 자각시키는 과거형의 말미.


그럼에도 시는 희망적이다.

전부'였었기' 때문에.

시인에게는, 우리에게는 그녀만이 눈에 비쳤던

환상체험의 기억이 있고, 그 경험의 가치는 무한하다.


그녀를 잃고 더 이상 지평선이 그녀로 이루어져 있지 않을 때

다른 것들로 채워진 지금, 눈을 감으면  그때를 떠올릴 수 있고

눈을 뜨면 다른 세상 또한 펼쳐져 있다.


지금 그녀는 우리의 전부가 아니다.

한 때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녀 없는 새로운 세계를 구축해간다.


믿어왔던 세계의 전부가 무너지는 경험은 필히 고통스럽다.

헤세의 표현을 빌리자면

새가 하나의 세계였던 알을 깨트리는 투쟁이다.


by ryong, 2015, Sony A6000


이제 지평선은 더 이상 그녀의 팔이 아니다.

깨트렸던 무수히 많은 세계, 전복되었던 감정과 이유들.

그 이야기가 모여 지금 바라보는 지평선을 이룬다.


그때는 좀 더 단순했고, 벅찼고, 기적 같았다.

하얗고 초현실적이었던 너로 이루어진 지평선.

지금은 쌓여버린 이야기들이 풍경을 복잡하게 만들었지만

이 풍경도 나쁘지 않다.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던 그 환희의 시간은 아니지만

느긋하게 언제든 몇 시간이고 바라볼 수 있는 그런 풍경이다.




너의 하얀 팔이 내 지평선의 전부였다.

지금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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