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사람, 사람 #4. 소방서의 회색늑대
기가 멕힙니다.
소방서 식당 옆 지하 창고.
그의 아코디언 연주(시시한 교회음악 몇 개와 아기가 섬 그늘에 등)가
끝나고 내뱉어야 하는 대사.
최대한 능글맞게 말하는 것이 노하우다.
안다. 나도 알고 그도 안다.
이것은 우스꽝스러운 연극이다.
나와 그가 서로 동의한 우스운 연극이다.
정해진 배역만큼만 행하는 것이 이 관계의 본질이니까.
그럼에도 이 연기는 억지스러운 것은 아니다.
배역에 충실할 때 우리는 서로 행복해질 수 있었다.
"넌 내 전문 사진사니까, 나만 멋지게 찍어봐."
"가족들한테 좀 보여줘야겠다. 아빠가 얼마나 고생하면서 돈 버는지."
사실 그가 고생하는 건 그때 처음 봤다.
1년가량 봐왔지만 그때 처음 봤다. 그마저 반나절이 지났을 때는 힘이 다했다.
아, 우리 주임님... 회색 늑대...
우악스러운 부장이 "얘들 군기가 빠져 갖고 말야.."
시시하고 별 볼일 없는 통찰을 내뱉을 때
"이렇게 말하는 이 친구는 방위 출신이여."
감칠맛 나는 한마디를 더하곤 했다.
주임(간부 계급)이 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승진이 늦었다. 욕심은 없었다.
소방서의 유물 사다리차를 몰 때는 늘 긴장했다.
부족함에서 권위를 빼면 귀여움이 된다.
이상한 공식이지만 분명 실재했다.
그가 승진하고 나도 상방(소방서의 상병) 계급을 달았다.
같이 승진했습니다. 주임님.
"이게 어떻게 같냐 임마."
"나는 임마 소방의 역사여."
알고 있습니다. 왜 모르겠습니까.
커피 드시겠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물 많이.
이제 볼 일은 없겠죠. 알고 있습니다.
연극은 끝이 났으니까요.
연극은 짧고 끝이 나니까, 그래서 좋아요.
이건 가벼운 희극이었고
대단한 얘기는 아니었고
그 뒤에 배우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무대 뒤 배우 모습은 비밀이어야 하는 불문율.
회색빛 머리, 회색 눈동자. 늑대를 연상케 하는 인상.
그 후의 모습이 궁금하지는 않다.
대충은 아니까. 회색빛 늑대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꼭 그렇게 되길.
아, 연극이 끝난 뒤의 이야기는 관객의 몫이다.
여운을 즐기고 시시한 상상을 해보는 특권.
우리가 둘 다 배우였다면, 안타깝게도 관객은 없었다.
그러니까 뒤의 이야기는 없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