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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Apr 29. 2024

<맡겨진 소녀>

Claire Keegan, <Foster>

소녀는 몇 달 동안 먼 친척집에 맡겨진다. 제목 그대로 맡겨진 소녀 <Foster>이다.


소설의 배경은 1980년대 아일랜드. 가난한 부모 아래에서 언니 셋과 함께 사는 소녀는 어느 날 킨셀라 부부의 집으로 가게 된다. 만삭인 엄마는 출산이 코앞이고, 먹을 입을 하나라도 덜고자 하는 부모 막내딸을 친척집에 맡기기로 한 것이다. 차로 몇 시간 떨어진 곳에 사는 먼 친척뻘인 킨셀라 부부는 기꺼이 소녀를 맡는다.


소설의 화자는 소녀이다. 독자는 소녀의 눈을 통해 아이를 둘러싼 세상을 본다. 친척집으로 가는 길, 아빠가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 누워창밖으로 움직이는 하늘과 풍경을 보는 장면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아이는 어른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자신의 경험치를 바탕으로 의미를 추측해 본다. 소녀는 스스로가 처한 상황을 이해해 보려 쓰며 자신의 새 거처를 탐색한다. 아이의 투명한 시선과 단순한 언어는 우리 모두에게 존재할 유년시절의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힘이 있다. 삶에 관한 빅데이터가 쌓이기 이전 우리는 대체로 어른들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지만, 그저 느낌으로 이해하지 않았던가. 내 마음을 표현할 언어는 갖추지 못했지만 그 느낌만은 더없이 순수하고 명확했다. 킨셀라 부인은 목욕물을 받아 꾀죄죄한 소녀를 씻겨준다. 귀청소를 해주고 머리카락을 빗어서 땋아준다. 소녀는 누군가가 자신을 소중하게 대해준다는 감각을 처음 경험한다. 그것은 낯선 안온함과 이상한 불안감이다.


아주머니의 손은 엄마 손 같은데 거기엔 또 다른 것, 내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 것도 있다. 나는 정말 적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지만 여기는 새로운 곳이라서 새로운 말이 필요하다.

p.25



소녀가 킨셀라 부부와 함께 살며 느끼는 것들을 통해 독자는 아이의 부모에 관해 추측할 수 있다. 소녀의 아빠는  거칠 생각 없는 인물이고(킨셀라 부부집에 도착한 날, 딸의 짐가방을 내려놓는 걸 잊어버리고 아이만 놓고 가버린다), 엄마는 임신과 출산을 거듭하며 가사와 돌봄 노동에 지쳐있. 킨셀라 부부는 비교적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자녀는 없다. 이야기의 중반부에 우연히 드러나기로, 그들은 몇 해전 사고로 외아들을 잃었다. 부부가 그 커다란 상실감을 조용히 견디는 모습이 굉장히 슬프고 인상적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온 소녀에게 아들이 썼던 방을 내어주고 다정하게 보살핀다. 들의 애정은 구체적이고 일관되다. 날밤에 녀가 매트리스에 오줌을 쌌을 때, 부인은 방이 습해서 매트리스가 젖었다며 아이가 수치심을 느끼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한다.



소녀매일 아주머니와 우물가에 가서 물을  뒤 손을 잡고 걸어온다. 아저씨와는 체통까지 뛰어가서 우편물을 가져오는 시간을 측정는 놀이를 한다. 는 언젠가부터 아주머니가 외출했다 돌아와서 차를 마실 수 있도록 물을 떠다 놓고, 우체통까지 뛰어갔다 오는 기록을 줄이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달린다. 부부는 소녀에게 책을 읽히고 집안일과 예의범절을 가르친다. 그렇게 그들만의 일상적 루틴이 자리 잡고, 세 사람은 차츰 자연스럽게 친밀해진다. 이 집에는 상호 존중과 사랑, 안정, 품위 같은 것들이 있다. 소녀는 자신만을 위한 따뜻한 식사와 잠자리에 편안함을 느낀다. 그것은 태어나서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살뜰하고도 온당한 돌봄이었다. 그렇다고 자신의 부모를 못마땅하게 여기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아이가 스스로 자신의 부모를 부정하는 서사가 오히려 부자연스럽다. 아이는 자신의 마음을 관조할 뿐이다.


아저씨가 손을 잡자마자 나는 아빠가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 들지 않게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힘든 기분이지만 걸어가다 보니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나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

p.69~70





여름이 지나고 새 학기가 되어 소녀가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온다.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언제나 그랬듯 묘사는 함축적이다. 우리는 너를 딸처럼 사랑한단다, 혹은 나는 아줌마 아저씨가 좋아요, 이 집을 떠나고 싶지 않아요, 좋은 걸 베풀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따위의 직접적인 표현은 다. 그들 사이에서 포착되는 감정의 대부분은 말해지지 않고 전해진다. 킨셀라 부부는 마지막으로 소녀를 시내에 데려가 학교에서 필요할만한 물건들을 사준다. 그저 쇼핑을 하는 장면일 뿐인데, 소녀에게 어울릴 만한 블라우스를 골라 입혀주는 킨셀라 부인 꾹 참고 있는 눈물을 분명히 본 것 같다. 소녀를 집에 데려다주고 부부가 집을 나설 때 아이가 느끼는 복잡한 마음 또한 동 묘사로 보여준다. 영상 매체가 아닌 건조한 활자를 통해 감정선이 뜨겁게 전달되는 감이 새삼 놀라웠다. 무엇보다 이토록 간결하고 함축적인 문체를 통해서 말이다. 그것은 아이의 언어로 서술되는 꾸밈없는 문장 속에 치밀함과 밀도가 내재되었기에 가능했다. 대단한 형식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에는 정말이지 덜어내거나 대체할 단어가 단 하나도 없다. 작가 클레어 키건이 전 세계적으로 찬사를 받고 있는 이유를 다시금 확인했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을 두 권 읽고 내가 얻은 결론은 두 가지이다. 첫째 결말이 특히 좋다는 것. 둘째는 2회독 할 때 더 좋다는 것이다. <맡겨진 소녀>는 소재나 플롯이 극적이지 않고 문체 또한 담담기에, 1회독 했을 때에는 '그냥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잔잔한 소설이네' 정도로 별 감흥을 못 느낄지도 모르겠다(그렇게 읽었다는 독자들의 리뷰를 여럿 읽었다). 독서 경험이라는 건 개인의 고유한 영역이고 독자의 성향에 따라 각양각색이겠지만, 나와 같은 INFP 형(의미부여를 잘하고 몹시 감성적임)은 이 책이 크게 와닿을 것. 결말에 이르렀을 때 나는 키건의 이전 소설 <이토록 사소한 것들>을 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감정이 아주 격정적으로 일어나서 또 울고 말았다.



소녀는 남은 생을 살면서 킨셀라 부부의 집에 맡겨졌던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유년 시절의 경험이 삶에 미치는 영향은 어느 정도일까. 사람과 사람주고받는 마음은 어떻게 기억되는 것일까. 우리는 타인을 어떻게  존중하고 사랑하는가.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서로 연결되는가. 부모게 자식은, 자식에게 부모는 과연 어떤 존재일까. 깊은 여운이 남는 짧은 소설이었다.







책을 권할 때 '한 번쯤 읽어보시라'는 의미로 일독을 권한다는 말을 흔히 쓰지만, 클레어 키건의 책만큼은 반드시 2회독 이상을 추천합니다. 문체가 상당히 함축적이라 다시 읽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많은 까닭입니다. <맡겨진 소녀>는 총 108페이지에 불과한 중단편 소설 분량으로 한 두어 시간 이면 완독이 가능하더라고요. 


아이리쉬 인디펜던트에서는 이 소설을 일컬어 "A Real Jewel"이라고 했고 선데이 타임스에서는 "A small Miracle"이라고  니다. 지극히 동의하는 바입니다.


혹여 이 책을 읽기 전이시라면,

조심스레 이독을 권해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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