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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Jun 11. 2024

눈부신 안부


백수린 작가의 첫 장편 <눈부신 안부>를 읽었다.


상실의 감각은 슬픔이라는 정서가 되어 화자의 삶 전반에 개처럼 깔려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일은 그런 것일 테다. 주인공이 겪은 상실의 경험에 깊이 이입해나는 마음이 아팠다.


세월이 흐르며 아픔은 나아지겠지만 마음속에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흉터가 남는다. 하지만 시간을 통과하며 흉터의 모습도 변하기 마련이다. 혹은 어떤 일을 계기로 그 흉터가 달리 보이기도 한다. 소설 속 화자는 나아간다. 처음엔 타의로 인해 끌려가듯 나아갔지만 어떤 순간부터는 스스로 걷는다. 기꺼운 마음으로. 어두운 곳에 묻어뒀던 아픔과 죄책감 서서히 빛을 받는다.


읽는 동안 내 마음에는 잔잔한 파동이 일었고, 결말에서는 꽤 큰 파문이 강타했다. 작가는 예상치 못한 반전을 선사하려 했고 그것은 내게 통했다. 몇 안 되는 퍼즐조각을 가지고 사람을 찾는다는 설정이 장편소설을 이끌고 가는 동력이었다. 그 물줄기를 따라가며 흥미롭고 궁금하고 슬프고 아련했다.




주인공은 현재 마흔 살 무렵인 '해미'이다. 소설은 해미의 시점으로 그녀의 어린 시절과 현재를 부지런히 오가며 어딘가로 나아간다. 그 중심에는 우리의 근현대사에 실존했던 파독간호사라는 이주 여성 노동자의 삶이 있다. 2남 2녀 중 장녀였던 행자(해미의 이모)는 스물하나에 파독간호사로 독일로 갔다. 그곳에서 번 돈으로 동생들 대학공부를 시키고 국가고시를 쳐서 의사가 되었다. 독일에 정착한 행자는 부모님의 생활비와 동생들의 결혼 비용까지 댔다.


미는 기억을 회상한다. 중학생 시절. 엄마와 여동생과 함께 이모가 있는 독일 G시에 3년가량 체류했던 때의 기억이다. 때는 해미의 언니가 사고로 갑자기 사망하고 난 뒤 얼마 . 언니의 죽음으로 부모님의 관계가 악화되고, 잠시 떨어져 지내게 된 것이다.


해미는 독일에서 러 '이모들'을 만다. 그들은 간호사로 일하기 위해 독일에 이주해 왔던 여성들이다. 영화 국제시장에도 등장했던 파독간호사는 이 소설에서 생생하게 개별화되고 구체화된다. 해미는 그곳에서 알게 된 친구들 (독일에서 나고 자란 한인 2세들)과 교류하며 지낸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언니를 그리워하며 언니를 잃은 슬픔을 품고 지낸다.


그곳에서 나는 그저 온전한 나였고, 레나는 온전한 레나였으며, 우리는 온전한 우리였다. 그런 시간은 이모가 시장에서 떨이로 사 온 무른 산딸기나 살구로 만들어주던 잼처럼 은은하고 달콤해서, 나는 너무 큰 행복은 옅은 슬픔과 닮았다는 걸 배웠다.

P.40


가족을 잃은 사람의 마음이 어떤 순간에 특히 무너지는지, 겪지 못한 자는 알지 못한다. 자식을 잃은 부모가 그 상실의 주체라면, 그런 제 부모의 모습까지 지켜봐야 할 남은 자녀들은 무얼 더 감당해야 하는 걸까. 상상만으로는 결코 헤아릴 수 없는 일에 나를 살며시 포개보는 일,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는 그 일을 해낸다.


언니, 나는 시디를 듣고 또 듣다가 오랜만에 언니,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발음했다. 일주일만 지나면 해가 바뀌고 나는 언니와 동갑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일 년 후부터는 내가 언니의 언니가 될 것이었다. 언니가 살아보지 못한 나이를 나 혼자 살게 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지만 그 역시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물론 해나에게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당시 나에게는 거짓말밖에는 할 것이 없었다.

P.50



해미는 독일에서 레나와 한수라는 친구들과 친밀해진다. 세 명은 아이들은 한수엄마(선자)의 첫사랑 찾기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나을 수 없는 병으로 투병 중인 선자를 위해 아들인 한수가 염원해 온 일을 돕기로 한 것이다. 아마도 한국에 있을 선자의 첫사랑을 찾아내기 위해 그들은 몰래 선자이모의 일기장을 읽는다. 독일에 오기 직전부터 쓰인 열세 권에 달하는 일기를 읽으며 첫사랑에 관한 정보를 수집한다. K.H.라는 이니셜 이외의 정보는 구하지 못한 채 세월은 흘렀다.




네가 찬란히 살았으면 좋겠어.
삶은 누구에게나 한 번 뿐이고 아까운 거니까.





K.H. 는 대체 누구일까.

이 의문은 수시로 엉켜버리는 듯 하지만 대단원에서 결국 해소된다. 어째서 그들이 서로를 품어줄 수 없었는지도 드러난다. 이 또한 아픈 이별이었다. 해미는 사람을 찾는다는 구실로 누군가의 내밀한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거짓말도 한다. 잘못을 저질렀다는 죄책감과 그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책임감에 휩싸이고, 이 일을 완수하기 위해 애쓴다. 해미는 알고 있었을까. 이 모든 과정에서 자신에게 어떤 용기가 생겨나고 있었다는 걸.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마음, 아끼고 애틋해하는 마음은 그 자체로 찬란하다. <눈부신 안부>는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믿음이자, 슬픔을 마음에 품고 한걸음 내딛어보는 . 슬픔이 있는 곳에는 사랑이 있었다는 것이 여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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