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 7시,눈뜨자마자 어김없이 자매의 밥상을 차렸다. 딸들은 입이 짧고 편식이 심한 편인데 다행히 완전식품이라는 계란을 잘 먹는다. 그 덕에 우리 집 아침식사는 거의 매일 계란이다. 계란국, 계란찜, 계란프라이, 스크램블..한정된 계란의 변주. 야채도 좀 먹여야 되는데 싶어서 오늘은 당근 버섯 파를 넣고 계란말이를 만들었다.
아이들은 7시에 눈을 떴지만 십 분째 침대에서 밍기적거리고 있었다. 보리는 게슴츠레 눈을 뜨고 말했다. "엄마.. 나 오늘 바이올린 가져가야되는데 차 태워주면 안 돼?" 나는 보리의 바이올린 가방의 어깨끈이 떨어진 걸 아직 못 고친 것이 생각나서 아차하고 그러마 했다. 차를 태워준다니 느긋해졌는지 보리는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고 담이는 주섬주섬 방으로 가서 놀잇감을 꺼내왔다. 어제 자신의 생일 파티 때 친구들로부터 받은 선물이었다. 담이의 생일 파티는 계획에 없었지만 급작스럽게 나의 즉흥성이 발동하여 일이 커진 것이었다. 코스트코에서 장을 보던 나는 문득 여럿이 생일축하노래를 부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같은 아파트에 사는 담이의 친구들에게 케이크 먹으러 놀러 오라고 연락을 한 것이다. 당일에 이루어진 갑작스러운 초대였기에 기대를 안 했는데 연락받은 6명의 어린이들은 선물까지 싸들고 전원 참석했다. 나는 부랴부랴 피자와 치킨을 배달시키고 코스트코에서 사 온 간식들과 과일 따위로 생일상을 차렸다. 친구들의 축하를 받으며 선물을 언박싱하던 담이는 아마도 태어난 이래로 가장 행복한 얼굴이었다. 어린이들은 우리 집 이방 저방에서 숨바꼭질,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학교놀이, 단체 그림 그리기, 슬라임, 줄넘기를 하며 4시간 넘도록 가열차게 놀았다. 아래층 없는 필로티 2층이라 다행이었다. 나는 중간중간 배고프다는 아이들에게 간식을 챙겨주고 음료수를 따라주며 시중을 들었다. 꼬마 손님들이 돌아가고 나서는 두 시간 동안 설거지와 집청소를 했다.
다시 오늘 아침으로 돌아와, 담이는 슬라임(아이들 놀잇감중에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을 만지느라아침밥을 잊어버린 듯했다. 그만두고 밥 먹으라고 세 차례쯤 말했는데도 놀이에 집중하고 있는 걸 보고 나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보리가 자기도 슬라임을 만져보고 싶다고 다가가자 담이는 '내 생일선물이니까 나 혼자 하고 싶은데?' 하고 밉살맞게구는 것이었다.
그만햇!
나는 참지 못하고버럭 했다.담이는 멈칫하고 내 눈치를 보더니 밥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기 시작했고, 보리는 서러워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부정적인 감정은 어째서 표출할수록 증폭되는가. 나는 그때부터 아이들에게 쉴 틈 없이 짜증을 냈다.
아침부터 슬라임을 만지면 어떡해, 시계는 봤어? 세수하고 밥 먹고 머리도 빗어야 되는데! 엄마가 차태워준댔다고 그렇게 미적거릴 거야? 둘 다 물통은 어디 갔어? 아직 가방에 있는 거야? 집에 오자마자 꺼내서 씻어놔야 한다고 했어 안 했어?!
나때문에 싸해진 분위기는 학교 가는 차 안에서까지 여전했다. 잠시 후 아이들이 뒷좌석에서 소곤거리는 게 들렸다.
-(속닥)언니, 학교 갔다 와서 같이 해, 슬라임.
-(속닥)그래.
아이들은 자주 투닥거려도 물에 휴지 풀리듯 금세 풀린다. 나는 엄마가 짜증 낸 장면도 아이들 마음속에서 녹아서 없어져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집에 돌아와서 핸드폰으로 어제 찍은 담이의 생일파티 사진, 최근에 생긴 자전거를 신나게 타는 보리의 영상을 보았다. 내 사진첩은 온통 아이들이다. 사진 속 해맑게 웃는 자매의 얼굴을 보니 아까 화낸 것이 미안해졌다. 기분이 울적해져서 어쩔 줄 모르고 서성거리다가 스포티파이로 음악을 틀었다. Bruno Major의 the Most Beautiful Thing에 이어 Nothing이 흘러나왔다. 폰을 블루투스 스피커에 연결해서 볼륨을 높였다. 고구마를 먹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더니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뭔가가 복받치고 치미는 감각. 눈물이 나오면서 정체 모를 해방감 같은 것이 찾아왔다.참으로 미묘한 감정이었다. 아이들은 더없이 사랑스럽고 나는 한없이 무력하다는 생각. 어린아이들과 매일 잠들고 눈뜨는 일상은 경이롭고 지긋지긋하다. 좋은 엄마가 되고 싶은 욕심도 있다. 나는 여직 감정을 조절하는데 서투른 나를 바라보았다. '좋은 엄마'라는 가면은 내팽개치고 그냥 원래 나로 돌아온 순간이었던 걸까. 짜증 나는데 후련하고 속상한데 자유로웠다. 음악을 들으며 소파에 드러누워 울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벌떡 일어나서 눈물을 닦고 요가수련을 갔다.
오후 3시. 먼저 집에 온 담이는 엄마!! 하며 뛰어들어와서 부리나케 가방을 열어보였다. (엄마! 라는 말을 나는 하루에 백번쯤 듣는 것 같다.) 같은 반 친구가 줬다는 선물을 내게 내보이며 눈을 반짝이며 행복해했다. 클레이로 만든, 다 쓰러져가는 모양새의 생일케이크이었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더듬거리며 말하는 아이의 얼굴을 -까만 눈동자를, 작은 코를, 아기새 부리 같은 세모 입을- 들여다봤다.
-우와, 담이가 기분 좋았겠네.
-응! 너무너무 좋아! 맨날 내 생일이면 좋겠어!
-담이가 이렇게 행복하게 웃으니까 엄마도 좋아. 그런데 담아, 아침에는 우리가 기분이 좀 안 좋았잖아.
-응? 아침에 그랬어?
-응. 엄마가 화내고 기분 안 좋은 채로 차 타고 학교 갔잖아.
-음.. 아.. 그랬나.. 근데 나는 다 잊어버렸는데?
-그래, 차에서부터 잊어버린 것 같더라. 그래서 말인데. 비결이 뭐야?
-비결? 그게 뭐야?
-응, 그러니까.. 너의 비밀방법. 기분이 금방 좋아지는 비밀방법 같은 게 있어? 엄마도 좀 배우게.
-음.. 아! 있어! 기분이 안 좋을 때는.. 어.. 자면 돼!
-잔다고?
-응! 그런데 만약에 잘 수 없을 때는.. 어.. 이렇게 눈을 딱 감고 백초를 세. 그리고 어제 좋았던 일을 생각해. 그러면 기분이 좋아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