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여행
가을인데 매일이 비였다. 이러다가 비에게 아까운 가을을 다 빼앗기면 어쩌지? 조바심이 났다. 극심한 더위와 혹독한 추위 사이의 이 짧은 한 때를 지켜내고 싶었다. 비에게 지지 말고 내가 찾아 나서야지. 그렇게 2025년의 가을 속으로, 우리가 직접 걸어 들어가기로 했다.
가을은 독서라기보다는 산책의 계절이다. 작년 이맘때 걸었던 창덕궁을 떠올리며, 이번엔 경복궁으로 향했다. 아이들과 함께 도슨트를 하며 궁궐을 제대로 둘러봐야지. 이왕 서울에 가는 거면 국립중앙박물관도 가야 했다. 사유의 방을 느껴보고 싶으니까. 아이들과 함께이니 국립중앙 어린이 박물관도 예약했다. 그러고 나서 기차표를 샀고, 동대문 근처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했다. 여행 일주일 전이었다.
그리고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이다.
아이들과 셋이 떠난 첫 배낭여행이었다. 처음으로 캐리어를 끌지 않고 각자의 짐을 넣은 배낭을 메고 다녔으니 이것이 백패킹이 아닌가. 지금 우리에겐 짐을 들어줄 아빠가 없다는 걸 애들에게 상기시켰다. 자매는 각자의 옷가지와 읽을 책, 노트와 색연필 따위를 담은 가방을 씩씩하게 메고 다녔다. 박물관에서 물품보관함을 한번 이용해보고 난 이후로 관람장소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코인락커를 찾아다녔다. 배낭을 락커에 넣고 나면 어깨가 날아갈 듯 가벼워진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북쪽으로 남산과 그곳에 우뚝 솟은 남산타워가 내다보인다. 우와 저거 케이팝데몬헌터스에 나왔어! 아이들이 반가워했다. 그래 우리 저거 보러 갈까? 가자! 극 P인 엄마를 아이들은 신나게 따라와 줬다. 지하철역으로 버스정류장으로 걷고 또 걸었으니 다리가 아플 만도 했다. 엄마 언제까지 걸어야 해요? 응 좀만 더 가면 돼. 여행이 시작된 서울역 앞 버스정류장에서 내가 했던 말을 아이들은 내내 기억했다. 아빠가 없어서 길을 잘 못 찾을 수도 있어. 엄마가 길 잃고 헤맬 수도 있어. 그런 일이 생겨도 화내고 짜증 내지 않을 수 있지?
남산자락을 굽이굽이 오르는 버스 안에서 석양을 봤다. 지는 해와 하늘빛이 아름다웠다. 남산타워 전망대에 오르자 도시의 야경이 내려다 보였다. 밤의 도시풍경은 낮동안 힘주고 다니는 누군가의 힘 빠진 모습 같았다. 이제 긴장 내려두고 푹 쉬어도 돼,라고 말해주는 듯. 반짝이는 어둠이 이불 덮듯 내려앉아 있었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일본에 있는 아빠에게 엽서를 썼다. 우표를 붙이고 우체통에 넣는 일은 그 자체로 낭만적이었다.
오전이었던 경복궁 투어가 오후로 변경되면서 아침일정이 비었다. 너무 가보고 싶었지만 망설여왔던 르누아루와 세잔의 전시를 보러 예술의 전당으로 향했다. 망설인 이유는 충분히 감상하지 못할 거라는 이유였다. 국중박 사유의 방에서도 오래 머물지 못했으니까. 아이들은 내가 혼자 감상에 젖을 틈이 주지 않는다. 대신 웃고 떠드는 순간들이 끊어지지 않는다. 결론은 잘 봤다. 오랑주리, 오르셰 전은 자매에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화가 르누아르를 각인시켰다. 어! 저 그림 우리 집 소파 위에 걸려있는 그 그림인데! 보리는 한눈에 르누아르를 알아보았다. 세잔이냐 르누아루냐, 우리는 퀴즈를 맞히듯이 그림들을 둘러보았다. 담은 세잔의 그림은 조금 춥고 르누아르는 따뜻하다고 말했다. 영상 시청 공간에 앉아있다가 이제 그만 나갈까? 하고 물었을 때 보리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오만몇천원이나 냈는데 좀 더 보고가요. 세상에, 아이들은 내 옆에서 모든 걸 보고 듣고 있었다.
경복궁으로 가는 길에 비가 내렸다. 비 맞으면서 투어를 하게 생겼네. 우산을 사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비가 멎었다. 날씨 덕인지 도슨트 선생님과 우리 셋이 오붓하게 경복궁을 걸었다. 만보 넘게 걸었는데도 아이들은 전혀 지친 기색이 없었다. 어제 박뭍관에서는 너무 다리 아팠는데 여기서는 다리하나도 안 아파. 너무 재밌어. 국립중앙박물관도 선생님이랑 같이 가고 싶어. 뭔가에 몰입하면 힘든 것도 잊어버리게 된다는 걸 아이들은 경험했다.
기차에서 내리니 밤공기가 찼다. 내일부터 기온이 크게 떨어진다더니 정말인가 보다. 집에 돌아와서 제일 먼저 침대 위 전기장판을 켰다. 담이 내일 입겠다는 옷이 있어서 나는 급히 빨래를 돌렸다. 그사이 아이들은 샤워를 하고 깨끗한 잠옷을 입은 뒤 따쓰한 침대 속으로 쏙 들어간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지금이라고 말하는 자매를 보며 나는 노곤한 기쁨을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