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에 대한 매우 구체적인 성찰
갓 태어난 아이를 '정상적인' 사회구성원으로 길러내고, 아픈 아이를 '완치'될 때까지 돌보며, 장애가 있는 아이는 평생 보조한다. 양육자와 사회, 국가의 책임이지만 실제 이 책임을 다하는 사람은 엄마다.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까지도 군소리 없이 수행하며 엄마들은 이 위험한 세상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
평범한 맞벌이 부부의 여덟 살 난 외동딸이 갑자기 백혈병(B세포 급성림프모구성백혈병)을 진단받는다. 위기상황은 재난처럼 예고 없이 찾아왔고, 따라서 피할 수도 없었으며,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책의 서두에는 아이가 병원에 가게 된 계기, 암센터에서 받는 각종 처치, 수술과정, 사용한 치료제의 명칭, 무균실의 풍경등이 묘사된다. 또래 아이를 키우는 독자로서 깊이 이입하여 눈물이 앞을 가릴 만도 한 내용이지만, 글의 어조가 몹시 단단하였기에 나는 울지 않을 수 있었다. 이 책은 단순한 투병기록, 간병기록이 아니다. '돌봄'에 대한 매우 구체적인 성찰이다.
모성애가 여성의 본능이라는 사이비 과학은 아주 오랫동안 여성의 희생을 연료 삼아 자기 발전을 거듭한 결과 모종의 신화가 되었다. 그리고 이 모성 신화는 반드시 헌신적인 돌봄을 전제로 한다. 영웅이 통과의례로 겪는 고난처럼 모성의 서사는 돌봄의 고통 없이 완결될 수 없다.
그러나 돌봄은 모성에서 뿌리내린 것이 아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모성은 돌봄으로만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을 잘 돌본다는 이유만으로 숭고한 모성의 담지가나 영웅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돌봄을 거부한다고 해서 섣부른 판단의 대상이 될 이유도 없다. 모성 신화는 여성에게 손쉽게 희생을 강요하는 동시에, 각 여성의 삶이 지닌 복잡하고 특별한 경험을 일거에 삭제한다. 저마다 다른 엄마들의 삶을 워킹맘과 전업맘으로 양분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은 지독히 안일하고 편협하다.
아이가 아플 때 간호하는 사람은 엄마이다. 엄마인 저자는 국회에서 의원보좌관으로 일하는 데, 아이가 아프게 되자 자연스럽게 육아휴직에 들어간다. 학원을 운영하는 남편은 여전히 일을 한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므로. (근무시간 대비 수입, 복리후생, 4대 보험 가입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따지면 아내가 아니라 남편이 사업을 접고 아이를 보는 것이 훨씬 이득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남편은 병원비 생각해서 일을 더 열심히 하라는 주위의 독려도 듣는다. 돌봄이 엄마의 일이 되고 부양은 아빠의 몫이 되는 과정에 그 어떤 논의도 합의도 없었다. 여성이 엄마가 되는 순간부터 자신의 이름 세 글자 앞에 '00 엄마'가 붙는다. 아이에게는 엄마가 필요하니까. 아이가 나를 찾으니까. 너는 박 아무개이기 전에 00 엄마니까, 그런 의문을 품어서는 안 된다는 세상의 통념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돌봄에 능한 성별이 따로 있을까. 바깥일보다 가사가 체질에 맞다는 어느 집 아빠를 안다. 금융권 직장에서 승진대로를 달리며 경력을 쌓아가는 내 친구는 세살 아들을 키우는 엄마다. 인간의 특성은 남녀불문 저마다 다를진대 전업맘 혹은 직장맘이라는 단어는 전업대디, 직장대디라는 말로는 쓰지 않는다. 10년 전, 첫 아이를 낳고 육아휴직계를 제출한 뒤 아기와 둘이 집에 있던 당시는 나도 일에 대한 욕구가 강했던 시기였다. 학교일을 이제 조금 알 것 같고, 내년엔 좀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래서 계속 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와 남편 중 누가 육아휴직을 써야 하는지에 관해서 당사자들을 포함한 그 누구도 논하지 않았다. 내가 주위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육아휴직 편히 쓸 수 있는 직업이라 좋겠다'였다. 뭔가 찜찜한 기분으로 감사해야했다.
가장 질투가 난 사람은 남편이었다. 나는 좌초하는데 그는, 적어도 직업인으로서의 그는 혼자 구명정을 탄 듯 건재해보였다. ... 이 비상 상황에서도 타인에게 이름과 직책이 불리고, 아이가 아닌 다른 것에 몰입할 수 있는 그가 부러웠다. 매일 샤워할 수 있고, 앉아서 밥을 먹으며, 낯선 이들 앞에서 구중중한 꼴을 보이지 않아도 되는 그의 일상이 부러웠다. 물론 그 역시 큰 성과를 낼 수도 없었겠지만 그렇다고 또 완전히 뒤처지지도 않을 것이었다. 우리 가족에게 닥친 이 엄청난 위기는 나와 그가 함께 돌파해야 할 것 같은데 왜 나만 멈춰 서서 자신을 온전히 헌납해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단 한 번도 나의 무력감에 대해 위로하지 않았다. 간병의 피로는 달래줄지언정 일을 그만둔 내가 느낄 고립감과 초조함, 허탈함에 대해서는 절대 언급하지 않았다. ... 실망이 차곡차곡 쌓이고 분노가 복리로 불기 시작했다.
경단녀는 있어도 경단남은 없다. 가족을 돌보느라 직장을 그만두고 한 시절을 보낸 뒤 다시 일을 찾아 나선 여성들에게 돌아오는 일자리는 경력 단절 없이 일해온 이들의 그것과 공평하지 않다. 이것은 누구의 탓인가. 인간은 누구나 돌봄이 필요하다. 우리는 모두 아기였고, 장차 노인이 될 것이다. 아플 때가 있고 쇠약해지는 시기가 있다. 돌보는 자와 돌봄을 받는 자는 따로 있지 않다. 서로가 서로를 돌봐야 한다. 가족끼리만 서로 돌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정상 가족을 꾸리지 않은 성인은 병원에서 수술받을 일이 생길 때 난감하다고 한다. 보호자 역할을 할 남편이나 아내, 자식이 없는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설사 있다 하더라도 저마다의 사정으로 오지 못할 수 있다(절연한 가족도 흔하다). 대신 가족처럼 지내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또한 돌보는 사람으로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생활동반자법 제정이 속히 시행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아픈 가족을 간병하느라 그림자 같은 존재가 되어버리는 또 다른 가족의 안녕과 매달 수백만 원에 달하는 간병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간병비 급여화도 더욱 폭넓게 이루어져야 한다. 돌보는 자를 돌보는 것이 정치라고 했다. 정치가 우리 삶과 맞닿아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두 딸이 세 살, 네 살이었을 때 나는 복직을 하느라 아침 돌봄 선생님을 직접 구했다. 고심 끝에 아파트 카페에 구인글을 올렸고, 우리 옆동에 거주하는 육십 대 초반의 여성이 매일 아침 우리 집에 와주시게 되었다. 아이들 아침밥을 먹이고 집 근처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는 것이 그녀에게 주어진 일이었다. 아침 7시에 벨을 누르는 그녀의 손에는 늘 뭔가 들려있었다. 아이들과 놀아주기 위한 색칠놀이, 풍선, 비눗방울, 만들기 도안 같은 것들이었다. 출근준비하랴 아이들 케어하랴 분주하던 우리 부부에게 그녀는 그야말로 구세주였다. 지금은 직장에서 육아시간이나 유연근무제가 널리 사용되고 국가지원아이돌봄서비스도 존재하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 오픈하지 않는 시간에 돌봄은 오로지 부모의 몫이었다. 나를 맘 편히 출근하게 해 준 건 남편도 부모도 아닌 돌봄 선생님이었다. 사랑이 많으신 선생님 덕에 평안한 날들이었다. 돌봄은 단순히 돈을 지불하고 노동력을 사는 일이 아니라 고마운 말을 다정한 방식으로 표현하며 서로 마음을 나누는 일이라는 걸 배웠다. 인공지능이 발달하고 로봇이 보편화되어 각종 전문직이 사라진다해도 인간의 영역으로 남을 일은 돌보는 일이다. "서로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조건이라면 이제 우리는 더 잘 의존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