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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May 16. 2024

최선을 다하지 않는 아이

수년 전 고2담임을 할 때, 선우가 우리 반에 있었다.

선우는 공부를 잘하고 운동도 잘했다. 성적으로 늘 우리 반 1등이었고 전교에서도 2,3등을 번갈아가며 했었다. (그 해 에 독보적인 전교 1등이었던 류정이-닉네임 공부기계-가 있었기에 선우가 1등은 한 번도 못했다. 류정이는 서울대에 무난히 입학했다.) 선우는 소위 범생이가 아니었다. 열정적으로 축구를 했고, 당시 신생 그룹이었던 뉴진스의 열성팬이었다. 패션과 외모에도 관심이 지대하여 자주 미용실을 방문하여 머리스타일을 바꿨고, 수학여행 가는 날엔 박시한 정장 재킷을 걸치고 모자를 비스듬히 쓰고 왔었다. 성격은 무척 시크했다. 말수가 많지 않았고 친절하거나 다정스런 구석은 찾아볼 수 없었다. 분명 예의가 없진 않은데 딱히 예의 바르지도 않았다. 선을 잘 지키는 아이였달까. 체육을 잘하고 터프하고 똑똑하고 공부까지 잘하는 선우는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아이들 개별 상담을 할 때 가장 자주 언급되는 친구가 선우였다.


쌤 선우는요, 공부를 많이 하지도 않는데 잘해요.
걔는 진짜 찐이에요.


선우는 못하는 게 없어요. 같은 남자가 봐도 좀 멋있어요.


친하게 지내고 싶은 사람은.. 홍선우요.



아이들은 이런 식으로 선우를 흠모했다.




명석한 아이이고 성적도 웬만큼 좋으니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애쓰겠구나 짐작했다. 내가 뭘 더 도와줘야 할까 생각하며 아이를 지켜봤다. 대체로 상위권 아이들은 생기부 상에 드러나는 스펙을 더 잘 쌓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지필고사는 물론이고 수행평가 항목에서도 만점을 받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이다. 학교에서 열리는 행사에 빠짐없이 참여하고, 개인적으로 교과 관련 독서 기록을 제출하며, 각종 소감문을 빼곡히 적어내서 그중 어떤 부분을 입력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든다. 하지만 선우는 달랐다. 얘는 도통 매사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나 : 선우야, 이번에 영어 어휘 대회 열리는 거 알지? 참가할 거지?

선우 : 아, 선생님 저 그건 안 하려고요.

나 : 응? 이번 학기에 다른 수상 경력?(생기부에 수상이 반영되던 때였다)

선우 : 아, 그건 아닌데 제가 좀 바빠서요.

나 : 그래도 한 번 해보지 그러니, 바짝 외우면 상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선우 : 제가 영어 단어에 좀 취약해서요. 패쓰할께요.




나 : 선우야, 이번에 과학 주제탐구 발표회 소감문 낸 거 봤는데 내용이 좀 빈약하더라.. 글자수 좀 더 채워서 다시 내면 어떨까?그리고 글씨도 좀 더 예쁘게..

선우 : 괜찮아요 선생님 저는 그 정도만 하려고요.

나 : 아이디어랑 활동 개요가 좋은데 그에 비해서 소감이 너무 짧은 것 같던데.

선우 : 아이 그 정도면 돼요 샘. 저 내일 축구대회라서 연습하러 가보겠습니다~


우리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학기 초에 선우 어머니와 전화로 상담을 했던 내용도 인상적이었다. 일상적인 상담이어서 아이의 가정생활에 대해 평범한 대화를 나눴었다. 선우가 학교에서 아주 팔방미인이라고 칭찬하고 가정에서는 어떤지 여쭸더니 어머니는 말했다.


선우가 집에서 말이 없는 편이라, 저는 사실 학교 생활을 잘 몰라요.. 잘하고 있다니 다행이에요. 감사합니다.
 저는 애 밥 챙겨주고 학원비나 교재비 필요하다 하면 주고 있어요. 무슨 공부를 어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물어도 자기가 알아서 한다면서 말을 잘 안 해주네요 선생님.



어머니는 진짜 잘 모르고 계시는 듯했다. 아이의 성적과 진로에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는 보호자가 전혀 아니었다. 선우는 처음부터 스스로 하는 아이였던 걸까, 아니면 약간의 방임적 양육이 아이를 독립적으로 만든 걸까. 궁금했다.




선우가 나를 실망시킨 일이 딱 한번 있었다.

영어 시간에 그룹 발표를 진행했을 때였다. 학생들의 영어 성취도를 고려하여 그룹을 짠 뒤 긴 글의 한 단락씩을 맡겼다. 한 모둠에는 1,2 등급의 아이와 3,4,5 등급의 아이와 6,7등급의 아이가 고루 섞여있었다. 주어진 시간 안에 구성원들이 모두 글의 내용을 파악한 뒤 자유로운 방식으로 발표하는 것이 목표였다. 서로 간에 소통과 협동심과 배려심, 인내심을 요하는 단체 활동이었다. 선우네 그룹을 짤 때 당연히 선우가 친구들을 잘 이끌어 줄거라 기대했었다. 하지만 선우는 자신이 맡은 문장만 완벽히 발표하였을 뿐, 나머지는 친구들이 각자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그들의 그룹 발표는 산으로 갔다. 수업이 끝난 후 따로 선우를 불러냈다.


선우야, 이건 함께하는 활동이었어. 내가 아는 걸 친구들과 나누는. 나 혼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뭔가 해낼 때 얻는 훌륭한 가치가 있어. 네 안에 있는 좋은 걸 밖으로 꺼내지 못한 것 같아서 나는 많이 아쉽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으면 그때는 다른 모습을 기대해 봐도 될까?

선우는 고개를 숙인 채 내 말에 끄덕였다.




당시 여러 교과 선생님들이 선우의 애쓰지 않음을 안타까워했다. 담임이었던 나는 "아.. 선우는 조금만 노력하면 서울대 갈 수 있을 텐데요!"와 같은 말을 수없이 들었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한 적 있지만, 대화를 몇 번 나눠 본 이후에는 선우의 모든 선택을 존중했다. 공부 좀 더 하라고 생기부 관리 좀 더 하라고 볶아치지 않았다. 남들이 가고 싶어 안달인 스카이에 초연하던 그 아이의 모습 신기했다.


선우는 절대 무리하지 않았다. 성취감을 맛보면서도 더 큰 성취에 집착하지 않았다. 남과 경쟁하는 것에 힘 빼지 않고 스스로에 집중했다. 대부분의 상위권 아이들이 안에 시달리며 입시에 매달리는 마당에, 선우는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여유와 낙관의 애티튜트는 어디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정말이지 보기 드문 아이였다.



그해 내가 선우의 생기부에 썼던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은 다음과 같았다. 선우를 떠올리며 나도 선우처럼 미사여구 없이 담백하게 썼다.


비판적 사고와 주도성에서 두각을 보이며, 주체적이고 낙관적인 태도로 본인의 과업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학생임. 주위 분위기에 쉽게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의 계획과 속도대로 학업에 정진함. 자아존중감이 높고 담대한 기질이 있으며 두뇌가 명석하고 논리적으로 사고하며 계획을 잘 세움. 자신을 내세우기보다는 뒤에서 관조하는 편으로 겸손함의 미덕을 갖추었음. 모든 과목에서 학업성취도가 우수할 뿐만 아니라 신체 활동을 좋아하며 운동에도 능력과 소질이 있음. 외모적으로도 단정히 자기 관리를 잘하며, 문화 다방면으로도 관심사가 넓어서 어떤 주제로도 대화를 나누며, 친구들로부터 좋은 평판을 받음. 언어 사용에 신중하여 정확하고 명료한 말을 간결하게 사용할 줄 알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곳에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쓰는 영민함도 있음.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눈치를 보거나 애써 노력하기보다는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믿고, 본인의 능력을 조용히 발휘하는 믿음직한 학생임.




지방 과기대에 진학했던 선우가 올해 재수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무래도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기로 결심한 것 같다. 역시, 트렌드에 민감하며(뉴진스도 봐야 하고)  활동적으로 노는 걸 좋아하는 선우는 문화적 인프라가 많은 서울이 어울리지. 하지만 선우를 더 독려하지 않은 걸 후회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깨닫고 배우는 사람이니 분명 자신의 행동을 돌아봤을 것이다. 더 열심히 하지 않았던 고등학교 시절을 과거를 딱히 후회하고 있지도 않을 것 같다. 그때 선우는 누구보다 즐거워 보였으니 말이다.


독립심과 자립심이 은 그 아이는 닥친 일을 슬기롭게 해결하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잘 꾸려나갈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공감능력다정함을 한 스푼씩만 추가하면 완벽할 것 같은데. 그건 내 욕심일지도 모른다.



스승의 날, 몇몇 졸업생들의 연락을 받았지만 역시 그중에 홍선우는 없다. 시크한 그 녀석이 문득 생각나는 날이다.





(학생들의 이름은 가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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