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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레는 가슴으로 봄이 오는 들녘을 달렸다

오늘은 내가 나폴레옹이다 (2)

by Kevin Kim

2024년 4월 19일 금요일.

파리에서 국경도시 '생장 피에드 포르'로 가는 길



`24년 4월 19일, 아침 6시. 파리 몽파르나스 역은 무척이나 붐비고, 높은 천장의 역사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나는 사뭇 흥분과 기대감으로 가슴 벅찼다. 드디어 시작이구나!


추석을 3일 앞둔 `80년 9월 20일. 전북 남원역에서 입영 열차를 기다리던 한 청년을 떠올려 본다. 그날 어색한 짧은 머리 청년은 귀에 들릴 정도의 큰 심장 박동 소리를 내며 두리번두리번 알만한 사람을 찾아보다 조교의 호루라기 소리에 놀라 기차에 뛰어올랐다. 오랜 세월 까마득하게 잊고 살았던 한 청년의 입영 장면이 파리의 몽파르나스 역에서 다시 재연되고 있다.

오늘도 그날 들었던 심장 박동 소리가 여전히 강력하게 내 귓가에 들려온다. 그리고 혹시 순례자 중에 아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참 묘한 기분이다. 기차 역사 곳곳에 배낭을 멘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한 눈에도 한국인들은 구별된다. 유명 브랜드 등산 배낭에 고어텍스 바람막이 점퍼 그리고 국산 모 브랜드 트레킹화··· 이들은 나와 같은 목적지 '생장 피에드 포르'로 가는 순례자임이 온몸 곳곳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모두 긴장한 모습으로, 그리고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선뜩 말을 걸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다. 파리의 악명 높은 소매치기 경고가 제대로 먹혔는지 바짝 긴장한 모습들이다. 그래도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여유롭게 보이려 노력했다.


중간 기착지 ‘바욘’으로 가는 TGV가 플랫폼에 도착했음을 모니터가 알려 준다. 사람들이 일시에 좁은 플랫폼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다. 피난민 같은 무리 속에 나도 배낭을 메고 한발 한 발을 내디뎠다. 갑자기 웅성거리는 한국인들이 보인다. 자신들이 타야 할 객차를 찾지 못하는 것 같다. 이 기차는 두 개의 기차가 직렬로 연결되어 있고, 우리가 타야 할 기차는 앞쪽에 있어 한참을 걸어야 객차 번호가 보이는데, 첫 번째 기차에 자기 객차 번호가 보이지 않자 당황한 것이다. 내 객차까지 걸어가 뒤돌아보니 그들은 여전히 그 자리다. 오지랖으로 되돌아 뛰어가 기차 위치를 알려 주고 다시 뛰어왔다.

바욘으로 떠나는 각국 여행자들. 이들 중 일부는 순례자들이었다

어떤 이는 작은 쌕 하나 달랑 메고 왔다. 어떤 사람은 보기에도 힘들 정도의 큰 배낭에 침낭과 매트리스까지 매달려 있다. 각자 사연의 무게, 염려의 크기만큼의 배낭을 꾸려 왔을 것이다. 등에 멘 배낭 이외에 각자의 가슴과 머리에도 많은 생각과 고민, 번민을 담고 왔을 것이다. 처절한 슬픔도 있을 것 같고, 떠나보냄의 아픔도 있을 것 같다. 신앙적 동기도 있으리라.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여행 가는 것처럼 그저 웃으며 신나게 기차에 오르기도 했다. 전혀 순례길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도 보였지만 각자의 생각과 동기가 무엇이든 이번 긴 여정에서 모두 성장의 기쁨을 누리길 기도하며 나도 기차에 올랐다.


그런데 배낭이 너무 무겁다. 집에서 출발하기 전 여러 가지를 포기하고 내려놓았음에도 지금 내 배낭은 등뒤에서 나를 짓누르고 있다. 본격적으로 까미노(Camino)를 출발하기도 전에 “무엇을 더 버려야 할 까?”를 고민하며 기차에 오르고 있다. 배낭에서 빼내야 할 불필요한 물건을 찾아내는 것처럼 내 마음 안에서도 내려놓아야 할 것들, 버리고 포기해야 할 것들을 귀국 전까지 찾아내고 버려야 한다. 여기에 온 목적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그래, 버리고 내려놓는 만큼 순례길의 풍경이 보일 것이다.


4시간여를 달린 TGV는 낯설고 생경한 도시 바욘에 내려주고 갔다. 날씨는 왜 이렇게 화창하고, 하늘은 또 얼마나 청명한지. 낯선 도시의 기차역 광장에 홀로 서 있는 내 모습이 오히려 낯설고 어색하다. 역 광장으로 순례자들이 줄지어 모여든다. 1시간 반 후에 떠나는 국경 도시행 기차를 기다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중간 기착지 바욘역 광장에 모여 정보를 나누는 각국 순례자 들

프랑스 관광청 홈페이지에는 “바욘을 방문해야 할 8가지 이유”라는 글이 있다. 내용은 이렇다. “프랑스의 숨은 보석, 바스크 지방의 숨 막히는 풍경, 역사적 랜드마크, 매력적인 골조 주택에 푹 빠져 보세요. 인파에서 벗어나 미식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쇼핑의 재미를 누려 보세요···” 그러나 이런 아름다운 유혹이 순례자들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2 칸짜리 꼬마 기차가 왔다. 기차는 순례자들을 넘치도록 태우고 소리 없이 달려간다. 차창 밖 풍경은 설악산 어느 마을을 지나는 듯 낯에 익다. 비좁은 틈 사이로 남아공에서 왔다는 노년의 부부를 만났다. 순례길에서의 첫 만남이다. 은퇴하고 세계 여행 중이라는 이 부부는 그동안 남미 파타고니아부터 시작해 아메리카 대륙 여행을 마치고 바로 이곳으로 왔단다. 파타고니아 여행에 대한 자랑을 계속하는 바람에 정작 이번 순례길에 관한 이야기는 나누지도 못했다. “언젠가 까미노에서 만나면 이야기 나눕시다” 약속했으나 아쉽게도 이 부부는 순례길 도중 다시 보지 못했다.


생장 피에드 포르 기차역. 모든 승객이 기차에서 내려 한 방향으로 걸어간다. 지도를 보거나 길을 물어볼 필요도 없다. 서양 사람들은 벌써 친구를 사귀는 대화에 열중하고, 아시아 사람들은 온통 심각한 얼굴로 소리 없이 걷는다. 나도 그 틈에 어중간하게 끼어 있다. 비장한 모습이거나, 신난 모습이거나 두 종류의 사람만 보이는 것 같다. 그렇게 도착한 '순례자 사무실' 앞은 벌써 많은 사람이 줄을 서 있었다. 작은 시골마을 골목이 온통 순례자들로 가득 찼다.

순례자 사무실 앞에서 등록 순서를 기다리는 순례자 들

한 시간 정도를 기다려 내 차례다. 친절한 자원봉사자에게서 한국인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배어 나왔다. 나는 노란 옷을 예쁘게 차려입은 프랑스 할머니가 상세하게 안내해 주었다. 한글로 된 피레네 등반 안전 수칙과 등산 지도를 설명해 주고, 순례자 여권도 발행하고 출발 날짜와 순례자 사무소 특별 스탬프를 찍어 주었다.

드디어 순례자 여권에 첫 스탬프가 날인되었다. 가슴 떨리는 순간이었다.

"이제 정말 시작이구나.” 마음은 담담했으나 가슴은 기대감으로 계속 뛴다. 멈추라 명령해도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머리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그냥 어지럽다. 간신히 진정하고 예약해 둔 숙소를 찾아갔다. 한국 사람들이 선호하는 55번 알베르게(Albergue, 순례자 숙소)에 가지 않고, 바로 아래 51번지에 있는 ‘생 자크 알베르게’를 예약했다. 알베르게 주인은 단층 침대에 소수만 같은 방을 쓰는 숙소라고 자랑한다. 며칠 후 나는 단층 침대가 순례길에서는 얼마나 호사스러운 것 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된다. 내가 머문 방에는 한국, 네덜란드, 브라질에서 온 순례자들 10명이 배정되었다. 오늘 이 사람들은 순례길 동기가 되어 30여 일간 내내 우정을 나누고 같이 걷다 헤어지기를 반복하게 된다.

사설 알베르게(순례자 숙소) 모습

생장 피에드 포르 거리를 거닌다. 마치 휴가 나온 군인이 오랜만에 자기 동네에 마실 나온 기분이었다. 여기 오기 전 유튜브에서 본 거리이기에 골목이며 상점, 다리 그리고 가게 앞에 졸고 있는 강아지, 고양이도 눈에 익다. 마을을 감싸고도는 작은 ‘니베’ 강과 그 위에 놓인 아름다운 다리, 노트르담 성당과 성문 등 마을의 명소가 오밀조밀 모여 있다. 소박한 국경 마을이지만 마을의 역사는 로마 시대까지 올라간다. 로마군, 서고트족, 게르만족 군대가 이 산을 넘었고, 이후 프랑스 ‘보르도’에서 스페인 ‘아스트로가’로 이어지는 로만 루트의 거점 마을로 사용됐었다. 프랑스와 스페인 간 무역과 전쟁, 십자군의 원정 경로로도 사용되었고, 1870년 나폴레옹의 이름으로 스페인을 침공하기 위해 프랑스 포병이 넘었던 그 산맥을 2024년 4월 20일 토요일 아침에 내가 넘어간다.

아름다운 프랑스 국경도시 생장 피에드 포르

마을 곳곳에는 각국에서 온 순례자들로 넘쳐났다. 비록 앞으로 가야 할 길은 멀고 험하겠지만, 까미노 출발 지점까지 온 것 자체만으로도 기대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마을 산책을 마치고 근처 식당에서 이른 저녁을 먹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은 게 없다. 부지런만 떨었지 정작 끼니도 챙기지 못한 것이다. 숙소 주인이 알려준 식당에 가서 정말 맛있는 스테이크를 먹었다. 하기야 무얼 먹어도 맛있었을 테지만···


숙소에 돌아오니 거실에 앉아 있던 사람이 말을 걸어온다. “내일 아침은 영상 2~3도로 쌀쌀하겠지만 눈, 비 예보가 없어 ‘나폴레옹 루트’를 넘을 수 있을 거야.” 거실 소파에 모인 사람들은 순례길에 대한 기대와 자기소개로 시간을 보내다 하나둘 침대로 들어가 이른 잠을 청한다.


나는 이렇게 순례자 숙소에서의 첫 밤을 맞이하였다. 이미 시차 적응을 마쳤는지 얼마 되지 않아 코 고는 소리와 함께 나도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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