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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던 바게트

오늘은 내가 나폴레옹이다 (4)

by Kevin Kim

2024년 4월 21일 일요일 (2일 차)

지옥의 내리막길 '수비리 가는 길'



아침 6시. 갑자기 알베르게 모든 실내등이 일제히 켜지고 잔잔한 성가 음악이 들려온다. 기상나팔만 없었지 훈련소 기상 시간 같다. 창문은 언제 열어 놨었는지... 피레네에서 불어오는 신선한 찬바람이 순례자들의 지친 육체와 멍한 영혼을 깨우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다행히 어제 피레네산맥을 넘는 여정으로 몸은 무거웠지만 아픈 곳은 없다. 가자! 순례길 2일 차 시작이다.


나는 분산 배정된 식당 중 사비나 론세스바예스 호텔에 배정됐다. 식당에 가니 많은 순례자들이 북적인다. 먼저 온 순서대로 자리에 앉아 샌드위치, 커피, 사과, 오렌지 주스로 구성된 조식 세트로 아침을 먹고 출발한다. 여기서 사과 1개는 비상식량으로 호주머니에 소중하게 들어갔다.


아침 7시 30분. 이제 본격적으로 2일 차 순례길의 시작이다. 하늘은 여전히 맑고 쾌청했으나 아침 기온은 영상 2도로 쌀쌀하다. 그런데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그 많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없다. 알베르게 침대 수가 180개였고 빈자리가 없었으니 출발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려야 함에도 왠지 썰렁했다. 2일 차 순례자들의 조급함으로 아침을 먹자마자 서둘러 출발한 것이다. 느긋한 몇몇 사람만 숙소 앞 광장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어제 만났던 자원봉사자에게 “내가 너무 늦었나?” 하고 걱정하니 “지금 적당한 시간이야! 건강하게 순례길 잘 마치길 바라!” 하며 환한 미소로 환송해 준다.

차가운 아침공기를 맞으며 공립 알베르게를 출발하는 순례자들


오늘 가야 할 '수비리'는 그리 멀지 않은 길인데 많은 후기에 '죽음의 내리막길'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무릎 보호대와 등산 스틱으로 무장하고 힘차게 출발한다. 출발하자마자 도로 표지판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790km라고 쓰여 있다. 선명한 ‘산티아고’ 글자를 보니 내가 순례길에 와 있다는 사실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순례길 최종 목적지 "Santiago de Compostela"까지 790Km 남았단다.


다시 출발하는 데 오솔길로 연결된 예쁜 숲길이 눈에 들어온다. 숲 속에 들어가자 놀라울 정도의 새소리가 합창처럼 시작되었다. “늦었나?” 하고 가졌던 조바심은 어디 가고 발걸음을 멈춰 버리고 말았다. 마치 숲 속의 요정이 걸어온 마술에 취한 방랑자같이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뒤돌아보니 어제 넘어온 피레네산맥 위로 붉은 아침 햇살이 산맥의 능선에 올라타 있다. 눈을 옆으로 돌리면 아침 안개에 덮인 너른 들판과 피레네 산맥 봉우리들이 한 폭의 수묵화처럼 펼쳐져 있다.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숲길을 그냥 지나가기 아까워 한참이나 제자리에 서서 새소리를 들었다. 뒤따라오던 순례자들이 “부엔 까미노!"를 외쳐주고 바쁘게 지나간다.

정말 아름다운 새들의 합창을 들으며 순례자들은 숲 속으로 발길을 재촉하였다.

숙소를 출발한 사람들은 마치 경주라도 하는 듯 빠른 속도로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일부 순례자들은 수비리 숙소가 부족하다는 정보를 듣고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고 한다. 나는 다행히 수비리에서 가장 인기가 있다는 ‘알베르게 아르가’에 예약되어 있어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숲 속 넘어져 있는 통나무에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버렸다. 해가 완전히 떠오르자 숲 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은 아름다웠고, 새들은 점점 더 크게 지저귀기 시작했다. 굳이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고 그냥 앉아만 있어도 마음은 평안하고 고요했다.


오늘은 일요일이다. 예배드릴 형편이 되지 않았기에 '이 숲 속에서라도 예배를 드려야겠다'라고 생각했다. ‘말씀 함께’ 묵상집을 열어보니 고린도로 간 바울의 이야기가 말을 걸어온다. 바울은 여기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나고, 영원한 것에 소망을 둔 바울은 가는 곳마다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헌신하며 교회를 확장하고 있었다. 그럼 나는 이번 순례길에서는 어떤 만남을 갖게 될 것인가? 또 이로 인해 앞으로의 인생 여정에서 어떤 이야기를 써 내려가게 될까? 궁금해진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가자 지나가는 순례자들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너무 태평한 건 아닌가?”


다시 걷기 시작해 불과 3km 걸으니 ‘브르구에테’ 마을이다. 집마다 창문에 놓아둔 화분들이 정겹다. 마을 중심에 있는 성당도, 거리의 가로수도 모든 것이 새롭고 예쁘기만 하다.

이른 아침 브르구에테 마을은 조용하였다.


브르구에테 마을을 벗어나니 다시 너른 들판 길이 나온다. 맑은 시냇물도 흐르고 새소리와 함께 풀을 뜯는 들녘의 소들도 평화롭다. 모든 풍경은 여느 시골과 같았으나 뭔가 다른 평화로운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두 번째 마을 ‘에스피날’을 지나자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됐다. 산으로 올라가기 전, 먼발치에서 다시 발걸음을 멈추고 숲 속으로 들어가는 순례자들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숲이 사람을 빨아들이는 모습으로 순례자들이 하나 둘 사라져 눈에 보이지 않는다.

산속으로 들어가는 순례자 들은 말없이 경쟁하듯 걸었다


조급하게 갈 길을 재촉하다 보면 놓치고 가는 풍경이 많아지는 것 같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에서 작가는 이야기한다. 결국 내 마음이 문제라고··· 세상이 바쁜 것은 사실 내 마음이 바쁘기 때문이라고. 내 마음이 쉬면 세상도 쉬고, 내 마음이 행복하면 세상도 행복해질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오늘 천천히 그리고 행복을 느끼며 걷기로 했다.

한참을 서서 주변을 돌아보고 사진도 찍었다. 이번 숲 속에도 아름다운 새소리는 멈추질 않았고 내 발걸음을 따라 새소리도 따라오는 듯했다. 그러나 눈을 돌려 찾아봐도 새들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런 곳에 텐트 치고, 비치 의자에 허리 깊숙이 앉아 사랑하는 사람들과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안개 낀 아침이면 모닥불에 끓고 있는 커피 한 잔을 따른다면 참 좋을 듯하다.

시간이 지나 해가 중천에 떠오르자 순례길은 한결 더 분주해졌다


출발한 지 10Km. 다행히 생각보다 어려움은 없다. 오히려 아름다운 스페인 시골 풍경과 세계 각국에서 온 순례자들과의 만남, 그 들과의 소소한 대화. 이런 시간이 마냥 즐겁기만 하다. 이번에 비로소 나는 알았다. 내가 '외향형'이라는 것을···

아침 식탁에서 먹지 않고 주머니에 넣어둔 사과 생각이 나 꺼내 든다. 평소 사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는 큰 기대 없이 한입 베어 물었다. 그런데 순례길의 마법사가 주문을 걸었는지 이렇게 맛있는 사과는 처음 먹어 본 것 같이 달고 맛있다.


길을 걷다 만난 외국인들과도 스스럼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제일 먼저 이름과 국적 탐색에 들어가고, 무슨 이유로 여기에 왔는지를 물은 다음, 이어지는 질문은 “왜 혼자인가?”였다. 한국인에게는 “왜 이렇게 한국 사람이 많은가?”라는 질문이 이어졌다. 식당에서, 숙소에서, 빨래방에서 심지어 샤워장에서 국적과 나이에 관계없이 질문이 이어진다. 그리고 성별, 국적, 나이 차이는 아랑곳없이 모두 ‘까미노 친구’가 되어 버린다.

미국 미네소타에서 어머니랑 같이 온 윌리엄과 첫인사가 그랬다. 이 친구는 아침엔 손이 시려 울 정도로 추웠는데도 반바지 차림으로 걷고 있다. 자기는 미네소타의 추운 날씨에 익숙해서 이 정도 날씨는 괜찮다고 했지만, 사실 종아리를 보니 벌겋게 얼어 있었다. 어떤 게 정답인지 모르겠으나 이 청년은 끝까지 같은 반바지 차림으로 순례길을 걸었다. 아마 반바지 하나만 가져온 것 같았다. 70대 초반의 어머니와 함께 순례길을 방문한 모습이 좋아 보여 까미노에서 만날 때마다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들은 먼저 걷다가 사람들 만나서 이야기하고 쉬면서 어머니를 기다렸고 또 앞서가다 기다리고 하는 방식으로 순례길을 즐기고 있었다. 아쉽게도 이들 가족은 약 200km 지점에 있는 ‘부르고스’ 이후에 다시 볼 수가 없게 된다. 어머니의 체력으로 무리였을 것 같다.

길을 걷다 나타난 Bar는 순례자들에게 사랑방 같은 역할을 해 준다.


언덕을 오르는데 70세쯤 되어 보이는 할머니가 손수레에 배낭을 싣고 힘겹게 올라가고 있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손수레를 밀어드리겠다고 하니,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몇 발짝 뒤에서 오르막을 다 오를 때까지 조심스럽게 따라가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지친 발걸음을 바라보다 우리 시대의 어머니들이 떠올랐다.

힘들어도 힘든 내색 하지 않고, 육체의 고통을 스스로 삼키며 자식들을 위해 일해 오신 우리 내 어머니들. 그 강인한 의지와 헌신으로 자식들을 키우셨다. 젊은 나이에 홀로 되어 자식 넷을 키우신 내 어머니. 어머니의 등 뒤는 지금 저 할머니처럼 언제나 힘겨운 상태였던 것 같다. 그때는 몰랐다. 어머니가 얼마나 힘드셨는지··· 돌아가신 어머니가 고맙고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손수레를 끌고 온 할머니 순례자


여기 까미노에 있는 순례자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 왔을까? 저 할머니를 바라보면서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여긴 왜 오게 된 거야?” 이 질문은 그 이후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내가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었다. 대략 구분해 보니, 1/3은 순수한 호기심에, 1/3은 신앙이나 정신적 이유로, 나머지는 아픈 상처 때문에 온 것 같다. 특히 사랑하는 가족의 사망, 이혼, 이별, 실직이나 부도 등으로 인한 마음의 아픔을 지닌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어떤 이유로 왔던 분명한 목적이 있는 순례자들은 산티아고에 도착하기 전에 각자의 질문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순수한 호기심만 가지고 온 사람들은 끝까지 방황만 하거나, 종종 이슈를 만들기도 했다. 그래도 여정 속에서 생각지 않은 인생의 질문을 발견하게 되거나, 인생은 그저 호기심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깊이를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고백을 목격하기도 했다.


쉬지 않고 걸었다. 중간에 작은 카페가 하나 나왔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 조금 더 가서 조용한 카페에서 점심을 먹겠다고 생각하고 다음 마을로 넘어갔다. 아뿔싸··· 오늘이 일요일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매일 오후에 '시에스타'를 즐길 뿐 아니라, 일요일에는 아예 가게 문을 닫는다는 사실이다. 다음 마을에 도착했는데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았다. 아까 그 카페에서 무언가 먹고 왔어야 했다. 비상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 문 닫은 카페 앞에 주저앉아 신발과 양말을 벗고 ‘거지 모드‘로 들어갔다.

마침 지나가는 백인 아가씨 배낭 옆주머니에 커다란 바게트가 매달려 있다. “그 빵 좀 나눠줄 수 있니?” 내 생각이 적중했다. 그녀는 기쁜 표정을 하더니 커다란 빵을 꺼내 충분한 크기로 잘라주었다. 옆구리가 동강 난 바게트는 바삭한 외투를 벗고 부드러운 속살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녹아내릴 것 같은 하얀 속살에서 풍기는 향긋한 버터 향은 주린 내 식욕을 자극하고도 남았다. 크게 한입 베어 물자 촉촉한 바게트 속살이 입안 가득 쫀득한 식감을 더해 주었다. 이렇게 맛있는 바게트를 먹어 본 적이 없다. 그녀의 체온 때문인지 햇살이 데워 주었는지 모르겠으나 분명 구매한 지 오래되었을 바게트는 따뜻했다. 바게트를 나눠주고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매우 만족스럽고 기쁜 얼굴이란 걸 걸음걸이가 말해 주고 있다.


이런 도움의 손길은 산티아고 순례길이 끝날 때까지 자주 찾아왔다. 상대방을 챙기는 마음이 유사할지라도 공감 측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배려해 주는 것, 그것이 사랑이 아닐까 싶은데 나는 순례길 내내 이런 배려와 공감의 순례자들을 참으로 많이 만났다. 사람들은 모두 사랑 베풀기를 원했고 주는 자, 받는 자 모두가 행복해했다.


산길을 오르다 일본에서 온 ‘우에다’ 씨를 만났다. 61살인 우에다는 여섯 살 많은 사촌 형과 같이 왔다고 한다. 순례길에 한국 사람이 많아 놀랐다는 말에는 불평이 섞여 있어 아쉬웠으나, 한참을 같이 걸으면서 정치, 경제 이야기로 생각을 나눴다. "한국, 일본, 중국은 경제적으로 상호 보완적이고 또 의존적인 관계인데 정치인들이 자꾸 이슈를 만들어내는 것 같아 아쉽다."라고 한다. 독도문제도 그렇고 위안부 문제도 일본 국민 대다수는 일본 정치인들의 주장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고 한다. 다만 정치적 목적에서 필요할 때만 예민하게 거론되는 기분이 든다고 한다. 한일 양국의 민간 대사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우리는 수비리로 내려가는 마지막 고개에 있는 푸드 트럭에 앉아 오랜 시간 함께 콜라를 마셨다···

오랜 시간 '한일 민간 토론'이 벌어진 수비리 고갯길 Food Truck.


어제는 산맥을 오르며 오르막이라고 불평했는데, 오늘은 올랐던 만큼을 계속 내려가고 있어 내리막이라고 불평한다. 오르는 길도 힘들었지만 사실 내려가는 길 또한 만만치 않다. 그러나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 많은 사람들이 수비리로 내려가는 마지막 5km를 무척 힘들어했다. 나 또한 이 내리막이 순례길 전 구간을 걸쳐 가장 힘든 코스 중 하나였다. 내리막 자체도 힘든데 바닥은 온통 설악산 ‘용아 장성’이 깔린 모습이랄까? 어떻게 바위가 세로로 세워져 바닥에 심어졌는지 모르겠다. 엄청난 지각 변동이 피레네산맥을 만들고, 남은 힘이 이 내리막을 만들었나 보다. 너무 힘들어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이 아쉽다.


어제 산맥을 오르고 오늘 내리막을 걸으며 나의 직장 생활이 정확히 오버랩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평사원으로 입사했다. 이후 계장, 과장, 차장, 부장, 그룹장, 이사, 상무, 전무, 부사장, 사업부장 그러다 사장이 됐다. 피레네산맥을 오르듯 쉼 없이 나를 채근해 왔다. 잠을 줄였고 시간을 아끼기 위해 평생을 5시에 기상하여 헬스장에서 땀을 흘렸다. 신앙과 간 건강문제로 마시지 않던 술도 비즈니스를 위해서라면 얼마든 마셔야만 했다. 어학 공부와 부족한 인문학 공부는 투자로 여기고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사원에서 사장 자리까지 쉬지 않고 피레네를 오르듯 땀 흘려 올라갔다. 그러나 결국 내려오는 길은 한순간이었다. ‘인사 명령’ 메일 한 통에 기념사진 한 장 제대로 찍지 못하고 낙엽처럼 떨어져 내렸다.


수비리 입구 다리 위에 있는 알베르게에 배낭을 풀었다. 침대에 앉아 있는데 늦게 오는 사람들 대부분은 무릎 통증을 호소하며 도착하였다. 이제 겨우 이틀 지났는데··· 하산 길에 등산화 안에서 발이 쏠리다 보니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거나 발톱이 시퍼렇게 멍든 사람들도 보인다. 내가 가져온 요오드 액을 나눠줬지만 보기 힘들 정도로 발 뒤꿈치가 벗어진 젊은이가 있어 안타까움을 더 했다. 나는 무릎 보호대, 등산 스틱, 바닥이 단단한 미드 컷 등산화 그리고 맞춤 인솔이 주효했는지 다행히 아프지 않고 도착했다.

오늘의 숙소, 알베르게 아르가와 아일랜드에서 온 자전거 순례자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어떤 사람이 “곧 식당 문을 닫으니 식사하려면 빨리 가라”라고 알려준다.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뛰어가 마지막 오더에 ‘폭 립’ 주문을 끼워 넣어 점심 겸 저녁을 해결했다. 주인장은 마지막 주문이 마감되었다며 거부하였는데 어제 피레네를 오르다 만난 바르셀로나 호세 마리아가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다 내가 곤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스페인어로 주인에게 뭐라 뭐라 했는데 주문이 접수되고 식사가 가능했던 것이다. 호세는 식당에 있던 스페인 사람들을 소개해 줬다. 이 들은 맥주를 쉬지 않고 마시고 흥겨워했다. 스페인 사람들은 참 흥이 많은 민족이었다.

수비리(Zubiri) 의 상징, Arga 강과 La Rabia 다리


까미노 둘째 날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염려와 기대로 시작한 순례길은 아직까지는 다행히도 큰 어려움 없이 조금씩 적응되고 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은 멀고 내 앞에 고난이 지뢰밭처럼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오늘의 무사 함에 감사하고 마음이 평안하다.


다리가 보이는 강가에서 강물에 발을 담그고 따뜻한 햇살 아래 몸을 뉘었다. 태양의 온기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햇살은 수액처럼 혈관을 타고 흘러 들어가 따뜻하게 몸을 데워 주었다. 그리고 나는 다리 위를 지나가는 늦은 순례자들에게 여유 있게 손도 흔들고 소리쳐 격려해 주었다.


“You did a good job!”

그렇게 오늘 하루를 마감하였다.


https://youtu.be/UtO8AUVRqCk?si=KKgjOhOAy8e0VBl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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