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내가 나폴레옹이다 (5)
2024년 4월 22일 월요일 (3일 차)
중세도시 팜플로나로 가다
이른 새벽에 잠이 깨었다.
창밖으로 강물 소리가 제법 세차게 들려온다. 출발하기엔 이른 시간이라 침대에서 한참을 뒤척이다 아침 안개를 보기 위해 강을 따라 산책하고 돌아오니 한 무리의 스페인 사람들이 출발하고 있었다. 반갑게 “부엔 까미노! 오늘도 건강하게 잘 걸으라.” 축복해 주고 방으로 들어와 잠시 침대에 누었다.
한 시간쯤 지난 후 출발 준비를 하는데 내 등산 스틱이 보이지 않는다. 분명 거실 옆 공용 공간에 신발과 함께 보관해 두었는데 없어진 것이다. 아끼던 물건, 그것도 나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 없어진 것이다. 오늘 아침 숙소를 나간 사람은 아까 보았던 스페인 사람들뿐이다. 어제 수비리로 오는 마지막 내리막에서 스틱이 없는 사람들은 정말 고생했는데··· 힘들었던 순례자 중 한 사람이 내 스틱에 욕심이 났나 보다.
말로만 듣던 순례길 도난 사건이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단 말인가? 너무 당황스러워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침착해야지 하면서도 왠지 마음이 아프고 슬프기까지 했다. 돈으로 치면 얼마 되지 않은 물건이지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고 내 마음 한구석에 분노까지 올라왔다. 겨우 순례길 3일 차에 중대한 고비를 맞은 기분이 들었다.
정신없이 가방을 꾸리고, 같은 방 사람들에게 스틱 훔쳐 간 사람 잡겠다 이야기하고 뛰어나갔다. 그러나 아무리 빠른 걸음으로 쫓아가도 그 한 시간의 차이를 메울 수는 없었다. 결국 10km 정도를 내달려 ‘수리아인’이라는 마을에 멈췄다. 아르가강 옆에 위치한 카페에 들어가니 많은 사람들이 반겨 준다. 낯익은 사람도 많았고, 나의 스틱 도난 사건을 화제로 한참을 이야기 나누었다. 스틱이 찍혀 있는 사진을 주면 자기가 왓츠 앱(What's App)에 올려 앞서가는 친구에게 연결하면 도둑을 잡을 수 있다며 제안하는 사람도 있으나 일단 따뜻한 커피와 샌드위치를 주문하고 힘을 내기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난 사건은 벌써 잊어버리고 낯설지만, 친근해진 사람들과 아침 식사를 즐겼다.
스틱 찾기를 포기하기로 마음먹고 나니 풍경도 눈에 들어오고, 길가의 모든 모습이 다시 아름답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중간중간에 있는 마을 성당도 들려보고, 각 성당에서 주는 스탬프도 순례자 여권에 정성스레 받았다. ‘이로츠’ 마을 뒤 언덕에 있던 푸드 트럭 앞 황톳길에 주저앉아 방금 내린 신선한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언덕을 힘겹게 올라오는 순례자들을 바라보는 재미도 참 좋았다.
어느새 7시간을 걸어 중세 도시 ‘팜플로나’ 입구에 도착했다. 아침부터 스틱 찾는다고 서둘러 달려왔더니 생각보다 일찍 도착하여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곧바로 팜플로나에 들어가는 대신 마을 입구에 있는 중세 시대 건축물 ‘산 페드로 다리’ 난간에 그냥 걸터앉았다. 맑은 하늘 아래 긴 거리를 걸어온 사람들이 하나, 둘 도착하고 다리를 건너 높다란 성곽을 따라 구도심으로 들어간다. 그 옛날 중세 시대에도 오늘 같았으리라. 허름한 복장과 두터운 가죽 장화에 긴 나무 지팡이와 호리병을 차고 절뚝거리며 이 다리를 건너가는 중세시대 순례자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난공불락의 성 팜플로나는 피레네산맥 서부 구릉지대에 있다. 스페인 ‘나바라’주의 주도이며, 과거 10~16세기 나바라 왕국의 수도로 번성했던 도시이다. 팜플로나에는 중후한 성곽이 여전히 남아 있고 구도심 또한 잘 보전되어 있었다.
이 도시는 스페인 여러 축제 행사 중 소몰이 행사로 유명한 '산 페르민 축제’가 열리는 도시다. 축제는 1324년부터 시작되었으니 참으로 유서가 깊다. 7월 6일부터 14일까지 매일 거리에서 벌어지는 이 행사를 직접 참관하는 건 새로운 경험이 될 것이나 스페인의 여름 날씨를 알기에 일단 포기하고 4월로 까미노 출발 일자를 당길 수밖에 없었다.
순례길 3일 차에 만나는 대도시 팜플로나는 까미노 초반, 아직 적응되지 않은 상태의 육체적 피로를 푸는 장소로 이용된다. 첫날 피레네산맥을 넘고 다음 날 수비리로 내려가는 자갈밭에서 받은 다리 피로를 풀기 위해 대부분의 순례자는 이틀 정도 머물면서 피로도 풀고 필요한 물건도 보충한 후 새롭게 출발하는 장소로 소개되어 있다.
젊은 사람들은 유명한 타파스 거리도 순방하고, 헤밍웨이가 즐겨 찾았다는 카페 ‘이루나’에 들려 초콜릿 추로스를 맛보기도 한다. 아쉽게도 나는 일정상 하루만 자고 출발하지만, 이곳에 머물며 재정비하고 출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다.
왓츠앱에는 스틱 사진을 빨리 올려 달라고 난리가 났다. 첫날 숙소 앞에서 브라질 청년이 찍어 준 사진과 한국에서 등산하며 찍은 사진이 있기에 그 사진을 공유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렇게 해서 도둑을 찾는다 해도 새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게 될 것 같았다. 그 사람은 분명 순례길을 망치게 될 것이고, 나 또한 좋을 게 없을 것 같다. 더욱이 지금 느끼고 있는 스페인에 대한 좋은 생각과 까미노에 대한 신성한 이미지를 버릴 수 있고 또 간신히 가라앉은 내 마음이 다시 요동칠 것 같았다. 차라리 내가 다른 곳에 두고 착각한 것으로 생각하자. 아니 다른 사람처럼 잘 보관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은 책임을 지기로 하자. 나보다 더 필요한 사람이 가져갔을 테니 그걸로 충분하다 생각하자··· 최종적으로 스틱 찾기를 포기하기로 했다. 오히려 마음이 더 편해졌다. "그래 그 스틱 잘 사용하여 다치지 말고 산티아고까지 무사히 가거라···"
헤밍웨이가 사랑했다는 도시답게 아름다운 구도심과 팜플로나 대성당은 예술 그 자체였다. 이 성당은 1397년에 건축이 시작되어 1530년에 완공되었다니 130여 년이 걸린 고딕 양식 건축물의 걸작품이다. 이후 일부분이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리 모델링이 되어 평면도는 라틴십자가 형태이고, 내부에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모상과 카를로스 3세 무덤이 유명하다. 미술 전문가 중에는 이 성당을 유럽 고딕양식 건축물 중에서 가장 상징적으로 꼽는다.
대성당을 돌아보다 한 켠에 작은 채플을 발견했다. 채플에는 아무도 듣는 이 없는데 아름다운 파이프 오르간 음악이 울리고 있었다. 풀썩! 맨바닥에 주저앉았다. 높은 천장을 돌아 떨어지는 오르간 소리는 아늑하였다. 그리고 생각지 못한 황홀한 경험을 누리게 된다.
파이프 오르간 선율에 맞춰 나는 마음속으로 춤을 추었다. 잠시 후 내 안의 무언가도 뜨겁게 춤을 추고 있다. 그리고 생각한다. “지금 나는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내 질문에 내가 대답한다. “잘 모르겠어. 그저 오늘 하루 까미노를 걸으며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냥 계속 걷는 것뿐이었어. 눈이 보이지 않아 어디로 갈지 모르는 존재처럼 그저 나약하게 노란 화살표만 따라 걸었어. 앞에 무엇이 있는지 어떤 일들이 있을지 알지 못하고, 나는 그저 화살표 흔적만 찾았고, 화살표가 보이면 안심했고 보이지 않으면 염려했어. 그런데 지금 팜플로나에 도착해 있는 거야 ···”
혼자만의 대화, 아니 그 누군가와의 대화가 길게 아주 길게 이어졌다. 너무도 아늑하고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아직 질문도 많이 남았고 적당한 해답도 듣지도 못했는데 사람들이 지나가다 이상한 듯 흘깃흘깃 바라본다. 후다닥 일어나 성당을 빠져나와 골목길을 내려가는 내 발걸음이 유난히 가볍고 경쾌했다. 작은 콧노래도 흘러나온다. 아무도 모를 거다 지금 내 기분을 ···
순례길에 오기 전까지는 혼자 걷는 이 길이 너무 외롭지 않을까? 걱정도 했고 실제로 파리에서, 바욘에서 그리고 생장에서 홀로 된 느낌으로 외롭기도 했었다. 그러나 막상 순례길을 시작해 보니 많은 사람들이 스스럼없이 말을 걸어오고, 즐겁게 이야기하면서 같이 걷다가 또 따로 걷기를 반복한다. 외롭다는 생각이 점차 사라져 갔고, 오히려 오늘은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까? 어떤 사연을 듣게 되나? 하는 기대가 더 크게 나타났다. 그리고 작은 채플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누군가와 만나 오랜 시간을 대화하고 같이 춤을 추는 이상한 경험도 했다.
까미노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것에도 한 가지 단점은 있다. 우연히 만난 사람과 한번 대화를 나누다 보면 한참을 함께 걷게 된다. 그런데 이 시간 동안에는 도저히 풍경을 보거나 혼자 생각할 시간이 없어진다는 점이다. 길가의 나무, 들풀, 야생화, 산새들과도 이야기 나눠야 할 텐데 상대방 예의상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나는 까미노에서 만나면 가급적 짧게 이야기 나누고, 저녁에 숙소에서 남은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으로 해결해 나갔다. 까미노에서 혼자 걷고 싶을 때는 귀에 이어폰을 꽂으면 바로 이해하고 길 반대편으로 자리를 옮겨준다. 멋지지 않은가?
저녁이 되었는데 별로 할 일이 없다. 대성당도 천천히 둘러보았고 필요한 스틱도 다시 구매했다. 헤밍웨이가 들렸다는 카페에 가는 것도 그렇고, 타파스 거리 순회도 싫었다. 이곳에서 이틀을 머물기로 한 순례자들은 전부 숙소를 나가 시청 광장 근처에 모여 와인을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을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곳 중국 슈퍼마켓 라면이 생각났다. “아 이런! 이렇게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니···” 슬리퍼를 끌고 나갔다. 슈퍼마켓이라기보다는 그냥 작은 구멍가게다. 주인은 영어가 전혀 안 된다. 하기야 라면 하나 사는데 무슨 대화가 필요하랴! 신라면 1개를 사서 숙소로 돌아와 주방에서 저녁 대용으로 끓여 먹었다. 비행기에서 승무원이 챙겨 준 스테인리스 젓가락이 현란하게 실력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밤늦게까지 내 입안 가득히 라면수프향이 머물고 있었다.
오늘은 긴 하루였고 도난 사건은 황당했다. 이 사건이 나에게는 마치 길을 잃어버린 것 같은 충격을 주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숨이 가빠지고, 발걸음은 멈추고, 마음속엔 온통 물음표만 가득하였다. 분노와 노여움도 몰려오고 실망과 허탈감도 함께 찾아왔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런 상황은 오히려 나에게 새로운 길을 여는 첫걸음이 될 거란 걸···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마음으로 다시 일어나 길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지금 팜플로나 어느 아늑한 알베르게에 몸을 뉘고 있다.
사진도 정리하고 빨래와 샤워도 했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하다 곧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요즘 젊은이들 표현이 생각난다. 바로 그 순간이다.
https://youtu.be/BtS65unjN_8?si=mpR3whwbVCV1-X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