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의 텅 빈 구시가지를 지나쳐 주말 빈티지 마켓을 구경해요
9월의 토요일 아침에 바덴바덴으로 향하는 시외버스에서 내리니 하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온통 흐린 날씨였다. 최고기온이 14°c라지만 한국의 9월을 생각하고 늦봄에서 초여름 날씨에 맞는 복장을 하고 집을 나섰는데,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그대로 얼어붙을 뻔 했다.
바덴바덴에 들어서니 역시 휴양도시답게 슈투트가르트나 뮌헨 등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이국적인 나무들로 거리가 꾸며져 있어 예뻤다. 러시아 부자들이 많이 오는지 앞에 보이는 은행에는 러시아어로 부동산 광고가 있어 신기했다.
분수대가 실제로 가동 중일 때 저기 앉아 있으면 물을 뒤집어쓸 텐데, 과연 몇 명이나 저기 앉아 있을지 궁금했다. 슈투트가르트 도심의 쇼핑 거리에도 저런 의자가 있는데, 거기는 매일 누군가가 앉아서 그날 산 것들을 정리하거나 와인잔을 손에 든 채 수다를 떨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에르메스가 이렇게나 핫해서 백화점 오픈 시간에 맞춰 가지 않으면 아예 들어가 볼 수도 없는 곳인 줄 알았다면 저기 한 번 들어가 봤을 텐데, 에르메스 치고는 너무 뜬금없는 곳에 있어서 들어가볼 생각이 들지 않았다. 슈투트가르트에는 2020년 초에야 겨우 생긴 에르메스 매장이 이런 소도시에 있는 것도 놀라운데 온갖 가게들이 모여있는 구시가 한복판도 아니고 도시 초입에 있는 것이 특이했다.
커다란 나무가 길가 양옆을 둘러싸고 있고 앉아 쉴 수 있는 하얀 벤치까지 줄지어 있어 왠지 아늑하고 평온한 느낌이었지만 토요일 아침이 아닌 평일에는 등뒤로 자동차가 지나다니고 사람도 많아 막상 저기 앉아서 책을 읽거나 뜨개질을 하며 여유를 즐길 수 없을 것 같다.
구시가는 위의 공원처럼 만들어진 대로를 지나 에르메스 매장에서 15분에서 20분 정도 걸어야 나오는데, 이른 아침이라 문을 연 곳이 없고 사람도 없어서 아주 황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거리의 어느 골동품 및 미술품 상점을 지나가다 샤갈의 동판화를 보고 사진을 찍어 왔는데 아무리 동판화를 여러 번 찍어낼 수 있다지만 가격이 생각보다 너무 저렴해서 진품이 맞긴 한 건지 의심이 갔다. 샤갈의 동판화 전시회에 다녀온 이후 집에 샤갈의 동판화 한 점을 들여놓는 것을 꿈꾸게 되었는데, 그래도 저 정도 가격이면 지금 당장이라도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슈투트가르트 등지의 슈퍼마켓에서는 뢰벤브로이의 캔맥주를 파는데, 그 맥주가 바로 이곳에서 만들어진다니 저녁에 여기서 맥주 한 잔을 하고 집에 가는 버스를 탈까 싶었지만 평소에 뢰벤브로이 맥주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자문해본 끝에 굳이 여기서 식사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생맥주가 슈퍼마켓에 파는 것보다 더 맛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큰 기대는 되지 않았다.
Weinstube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니 와인을 양조하거나 최소한 자신들이 판매하는 와인에 자부심을 가진 곳인 모양이다. 나는 와인보다는 맥주 파라서 그냥 지나쳤지만 가게가 예뻐서 사진을 찍어 왔다.
여기는 고대 로마 시대에 사용되었던 온천 유적도 있지만 고대가 아닌 현대의 이용객들에게는 근처의 Caracalla만큼 큰 인기를 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내가 갔던 날에는 내부 공사 일정이 있어 들어가볼 수 없었다.
온천을 보자마자 꽁꽁 언 몸을 녹일 수 있어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천이 이렇게 반갑기는 처음이었다.
온천에 대한 후기는 이 글에서 읽을 수 있다.
날씨가 좋았다면 사진이 더 예쁘게 남았을 텐데, 날씨가 사진 속에 남은 멋진 건물의 매력을 제대로 살려주지 못해 아쉽다. 온천욕을 마치고 점심시간이 되니 그제서야 사람들이 거리에 보이기 시작했다.
늘어선 케잌들을 보고 브런치를 즐기겠다는 처음의 결심 따위는 전부 내버리고 홀린 듯 ‘검은 숲 케이크’인 초코&체리 케잌과 카푸치노를 주문했다. 이 케잌을 다 먹고 나서도 배가 고프면 (브런치가 아닌) 다른 케잌을 먹어봐야겠다고 생각했던 게 지금 생각하면 웃음포인트인데, 몇 년 전의 나는 케잌에 매우 진지했다.
케이크에 올라간 크림이 너무 묵직하지도 않고 케이크 속 체리도 맛있어 만족스러웠다. 케잌을 다 먹고 주변을 돌아보니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맛있게 생긴 디저트는 전부 내버려두고 브런치를 먹고 있기에 잠시 고민했지만 바덴바덴까지 온 김에 보고 가야 할 것이 산더미라서 관광하다 배가 고파지면 그때쯤 무언가를 또 먹기로 하고 호텔을 나섰다. 이때까지만 해도 바덴바덴이 볼 게 아주 많은 곳이라 생각했다
토요일에만 선다는 빈티지 시장을 구경하러 강가로 향하는 길에 기념품샵을 마주쳤다. 수건이 정말 예뻐 사올까 하는 고민이 있었지만 바덴바덴이 수건에 수놓인 올리브나 레몬으로 유명하지는 않으니 굳이 여기서 이걸 살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몇 년이 지난 지금 다시 사진을 봐도 예뻐서 이 수건을 사 왔어야 한다는 후회가 좀 든다.
사실 슈투트가르트에도 토요일마다 빈티지 시장이 열리지만 어느 날 우연히 장이 선 것을 보고 구경한 이후 별로 재미가 없어 다시 가 보지 않았는데, 트립어드바이저에서 바덴바덴의 빈티지 시장을 적극 추천하기에 한 번 가 보기로 했다.
강을 따라 쭉 걷다 보니 온갖 물건을 다 파는 곳답게 신기한 물건도 많이 나와 있어 나름대로는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는데 더 놀라운 것은 강변 시장을 꽉 채운 사람들이었다. 분명 매주 열리는 똑같은 시장일 텐데 이 사람들은 대체 뭘 사겠다고 이렇게나 모여든 걸까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시장 특유의 활기찬 분위기가 좋아 즐거운 구경을 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