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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아 Oct 20. 2020

우리들의 Only Jazz

'누군가 그 시절 우리를 기억할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음악적 재능은 잼병이다. 음에 관한 센스도 예민하지 않고, 들었던 음악에 대한 기억력도 평균보다 떨어지는 편이다. 취향도 그저 대중적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을뿐더러 무엇보다 음악을 듣는다는 행위 자체가 내 생각의 B.G.M 정도에서 머무르고 있다. 사실 음악을 싫어하는 사람은 발견하기 어려운 법이니까 그저 보통 보통인 셈이다. 

그래도 호기심은 왕성한 편이어서, 어렸을 때부터 그런 문화적인 것에 대한 동경은 감출 수가 없었다. 

물론 무엇이든 금방 싫증을 내곤 해서 그것들이 일정 수준의 깊이를 가지게 된 적은 없었지만....


대학 때 우연히 한 친구를 알게 되었다. 아주 전문적으로 음악을 듣던 친구였는데 그 범주가 클래식에서 재즈, 팝, 가요를 가리지 않았고, 내가 느끼기에도 일반적인 수준을 월등히 뛰어넘는 클래스였다. 호기심이 동했다. 

친구와 가까워져 이야기하게 되면서, 나도 뭔가 수준 높은 음악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래서 네가 좋아하는 음악들을 내게도 추천해 달라고 했더니, 기특해하면서 아주 좋아했다. 

  

잔뜩 기대하고 있었는데, 다음날부터 직접 녹음해 와 내게 건네주었던 음악들은 하나같이 너무 어려웠다. 조금이라도 대중적인 선율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난해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 수준으로는 듣기에도 곤혹스러웠는데, 그는 내게 감상평을 요구해 왔다. 뭘 알아야 면장을 한다고 듣기도 힘든 곡들을 평하라니, 내가 괜한 부탁을 했다는 후회가 물밀듯이 몰려왔다. 그렇게 몇 차례 시름을 한 후 슬그머니 음악에 대한 추천을 더 이상은 청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건 그 친구로부터 주워 들었던 몇몇 음악에 대한 지식들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보석과도 같은 것들이었다. 고마웠지만 더 이상의 도전은 내게는 힘든 것이었다.     


하지만 친구와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이 나지는 않았다. 졸업 후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는 아예 음악전문지의 기자가 되어있었는데, 하고 싶었던 직업을 갖게 된 덕분인지 음악에 대한 식견과 이해도는 더 깊어져 있었다. 그리고 추천해 주는 음악들도 편안해져 대학 때의 난해함은 사라져 있었다. 

그냥 가만히 그의 이야기만 들어도 어느새 함께 한 공간은 어느 전문 음악 감상실에 뒤처지지 않은 품격을 갖추게 되었다. 그래서 그와 함께했던 시간들은 그저 그런 술자리를 뛰어넘는 재미가 있었다.

 




서른 한 둘이었던 나는 당시 일종의 사고뭉치였다. 하고 싶은 일들을 그저 저지르는데 선수였는데, 몇 번의 술자리 후 아예 친구와 재즈 음반 전문점을 오픈하기로 의기투합하였다. 나와 늘 파트너로 몰려다녔던 몽상가 사수에게도 함께 하기를 권유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 달쯤 후 아주 목 좋은 곳을 수배하였고, 우리는 Only Jazz라는 음반가게를 오픈했다. 재즈가 우리나라에 이제 막 물밀 듯이 소개되던 시점이었으니, 금방 음악동호인들에게는 유명 가게로 소문이 났다. 


그런데 친구는 좀 특이한 방식을 가게에 도입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되는 것일 수도 있는데, 음반을 직접 들어보고 구입을 결정하게 하였다.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가게에 음반을 구입하러 온다기보다는 음악을 들으러 몰려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우리는 각자 본업이 있었기에, 가게 운영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늘 북적였지만 매출은 엉망이었다. 


밤이 되면 Only Jazz의 네온사인은 몽환적으로 반짝였고, 수없이 아름다운 재즈의 선율은 거리를 녹여놓았다. 사실 매출 따위는 크게 상관없었고, 우리는 그곳에서 밤마다 음악을 들으며 서로의 시름을 달랬다. 망하게 되어 고민도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그런 근심의 하나였을 뿐이었다. 언제나 좋은 음질의 음악을 들을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다 잊었지만 그가 들려주던 음반들은 하나같이 명반들이었는데, 그럼에도 내 귀가 틔지 않은 것으로 보아 나는 역시 음악에는 확실한 잼병이었다.


우리는 유명했으나, 얼마 버티지는 못했다. 그래서 음반들을 이리저리 처분하고 문을 닫게 되었는데, 나는 임대할 당시 건물주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사실 이 가게 자리가 노처녀들이 시집가는 터라면서, 미혼이었던 내게 아마 결혼하게 될 거라는 우스개 소리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는 가게를 폐점하면서 결혼을 했다. 건물주의 이야기는 사실이었던 셈이다.


세월이 흘러 이십오 년이 넘었는데, 친구는 아직도 라디오에서 클래식 음악프로 DJ를 하고 있다고 한다. 수십 년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니 아마 그의 음악적 공력은 이제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 일 것이다. 오늘은 한번 그의 음악프로를 들어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만나게 되면 지금은 내게 어떤 음악을 추천할까 호기심이 생기기도 한다. 선인장과 함께 두었던 Only Jazz의 네온사인이 보고 싶은데, 사진 한 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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