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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아 Nov 01. 2020

눈이 오면 조용해

   



하늘에서 내리는 것들은 아주 특별하다. 눈이건 비건 그것들이 땅으로 떨어지는 순간 세상은 달라진다.

이른 아침 커튼을 젖히자 알 수 있었다. 낮게 내려앉은 하늘이 밤새 뭔가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

습기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버겁게 느껴졌고, 이제 곧 무언가를 쏟아내야 가벼워질 듯 보였다. 

적어도 십분 안에는 너를 볼 수 있겠구나....

 

휘휘 하나, 둘 눈발이 허공을 돌다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곧이어 그 크기가 조금씩 커지고, 주위가 점차 회색빛에서 뿌연 하얀색으로 변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엄청 큰 눈송이가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눈발에 가려져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공간은 따뜻해지고, 어쩐지 비밀스러워진다. 소음이 잦아들면서 조용해진다. 그 어느 때 보다 고요한 아침이 된다.


눈은 신기하게도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결코 뱉어내는 법 없이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이 세상 모든 것을 감춘다. 이제 눈과 함께 고요해진 세상을 보니 나는 갑자기 막막해져, 손을 내려뜨리고 한없이 눈을 바라본다. 눈이 오자 달려 나와, 뛰며 뒹구는 아이들의 발자국 소리도 웃음소리도 완벽한 무음이다. 

들을 수 없다. 깊은 바닷속의 침묵처럼 느껴진다. 

‘물에 갇히면 고요해지듯 눈에 갇혀도 고요해지는구나.’ 우리 모두는 눈의 바다에 빠져든다. 

육각형의 결정체인 눈은 최고의 흡음재이다. 눈의 입자 한가운데 작은 금속 방울들이 박혀있어 떨어지는 자리마다 다른 음파를 만들어 내면 세상은 너무 시끄러울까 잠시 공상해 본다.      



무성영화 같이 동작만 크게 느껴졌던, 눈의 세상에서 즐거웠던 한 장면이 생각난다. 

15년 전쯤 이월 마지막 날 일요일, 갑자기 폭설이 쏟아졌다. 그날의 폭설 이후 아직까지 그렇게 큰 눈이 내렸던 기억은 없다. 겨울도 다 가고 내일이면 삼월이었는데, 갑자기 눈이 펑펑 쏟아졌다. 눈송이도 여느 때와 달랐다. 그야말로 손에 잡으면 커다란 솜뭉치처럼 느껴졌다. 습기도 덜 머금어 잘 녹지도 않았다.


다음날은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식이었다. 

나는 월요일이면 정식 학생이 된다고 긴장하고 있는 아들을 위해 신경 써서 저녁에 먹을 간식을 샀다. 슈퍼에서 딸기를 1킬로쯤 샀는데, 손에 들고 나오니 펑펑 쏟아지는 하얀 눈과 빨간 딸기의 조합이 어쩐지 현실성이 없이 느껴졌다. 대비되어 눈은 더 하얗게, 딸기는 더 빨갛게 보였다. 거리는 눈으로 매우 복잡했지만, 그래도 어쩐지 조용한 듯 느껴졌다. 


점점 눈은 쌓여가고 차는 엉금엉금 기었다. 남편도 열 시를 넘겨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와 딸기를 나눠먹고, 거의 열두 시가 되어 갈 무렵 남편은 자꾸 밖으로 나가자고 재촉했다. 나는 입학식도 있고 해서 감기 걸린다고 주저했지만, 무조건 나가자는 남편의 말에 어느새 아이에게 두꺼운 패딩을 입히고 있었다. 오후 내내 과격한 눈 놀이에 지친 이웃의 꼬마들은 이미 집에서 잠에 곯아떨어졌을 시간이었다. 그래서 집 앞 공원은 너무나 조용했는데, 아직도 눈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서 우리는 영화를 찍었다. 그야말로 뒤로 두 팔을 벌린 채 넘어져도 푹신할 만큼 눈은 쌓여 있었다. 집 앞 공원은 평소와는 전혀 다른 눈의 동산을 우리에게 선사했다. 이리 뛰고, 저리 넘어지고, 깔깔대고 웃어도 역시 눈 덮인 세상은 고요했다. 손재주 좋은 남편은 아이와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주위에는 이미 여기저기 꽤 많은 눈사람이 보였지만, 충분히 시간을 들여 더 크게 더 크게 눈을 굴렸고, 아이 키보다 훨씬 큰 눈사람을 완성했다. 그리고 그 눈사람을 집에서 공원을 통해 이어진 학교 가는 길 입구에 세웠다. 꺾은 가지로 얼굴도 완벽하게 만들었고, 누가 봐도 주변 눈사람들에 비해 월등히 완성도 있는 멋진 눈사람이 탄생했다. 

 

늦게까지 그렇게 눈밭에서 뒹굴었지만 아이는 감기에 걸리지 않았고, 씩씩한 아침을 맞이했다. 우리는 미끄러질까 조심조심 공원길을 통해 입학식이 열리는 학교로 향했다. 저만큼 학교로 통하는 길 입구에 우리의 눈사람이 서 있었다. 반가웠다. 그리고 눈사람은 말없이 아이를 응원했다. 눈사람을 지나치면서 아이의 어깨가 으쓱해졌다. 며칠간 녹지도 않고 한참을 갔던 눈사람을 아이는 아침저녁 보러 나갔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 눈이 우리에게 준 조용한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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