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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아 Mar 24. 2022

한바탕 꿈이었나...

다소 촌스러운 엄마의 엄마를 향한 A4 픽션



이제는 아주 작아진 여자가 높은 튓 마루에 앉아있다. 너무 쪼그라져 뒤에서 보면 그녀의 모습은 이제 앉기를 시작하는 아이처럼 위태롭다. 누군가 꺼내 오랜만에 입혀준 철 지난 미색의 비단 한복. 개켜진 채, 골이 깊게 팬 옷 주름이 바로 그녀의 시간이다.      

집은 지어진 지 꽤 오래된 그저 그런 시골집이다. 몇 번은 지붕을 다시 고치고, 담장을 새로 쌓아 그 집의 첫 시작을 떠올리기란 어렵다.

초가가 기와가 되었고, 기와가 다시 파란색 양철지붕이 되었는데 빛바랜 파란색 지붕 사이로 여기저기 노란 녹이 피어있다.     

가끔 여자의 안부를 위해 드나드는 이웃 아재 말고는 그곳에 큰 인기척이라곤 없었다. 그런데 오늘, 열명 가량의 남자와 여자들이 그녀의 집에 모여들었다. 초로와 중년, 장년의 나잇 대가 고루 섞여 있다. 그날은 그녀가 아흔다섯 번째 맞게 된 생일이었고 큰 마음먹고 성사된 행사였다.

어느새 두 아들도 등이 살짝 굽고 며느리와 딸의 얼굴에도 주름이 자글거렸지만 그래도 간만의 만남이라 그럭저럭 안색이 밝다. 여자들이 부엌과 마당을 오가며 전을 부치고, 고기를 삶고 또 생선을 굽는다.

오랜만에 만난 그들은 음식 하는 내내 안부를 묻고 끊임없이 수다를 떤다. 별거 아닌 말에 소리 내어 웃고 있는 그들은 사실 오랜 세월 싸우고, 서로 배신도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있다. 그리고 만나면 이상하게 스스럼없는 사이가 된다.

그녀는 가만히 앉아 그들의 움직임을 바라본다. 하지만 오늘도 ‘보고 싶은 얼굴은 눈에 띄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한다.     

이제 모두 그녀를 노할매라고 부른다. 여자는 누군가의 ‘어머니의 어머니’가 되어버렸다. 모두 그렇듯, 어린 시절의 이름이 사라진 지는 오래고, 젊은 시절 누구의 처로 불리다가 누구의 엄마였던 적도 있었겠지만 이제는 그냥 노할매이다.   


   




햇살이 따뜻해지자 그녀가 앉은 마루, 그 곁에 기는 아이가 올려진다. 손녀가 낳은 돌이 지난 남자아이의 얼굴은 동그랗게 실하다. 아이의 엄마가 탐스러운 홍시 바구니를 그들의 앞에 밀어 놓는다. 아이가 하나를 집자 그녀가 하나를 집는다. 아이는 홍시를 짓이겨 빨고, 그녀는 쪽쪽 빨아 오물거린다.

아이와 여자가 앉은 뒤쪽, 안방 벽에 높이 걸린 사진들이 보인다. 벌써 십오 년 전에 먼저 간 남편과 다섯 자식들의 독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다. 

두 번째 홍시를 집어 들며 여자가 ‘훈이는?’하고 묻는다. 

용케 그 소리를 들은 막내며느리가 ‘훈이 씨는 좋은 데 갔어요.’라고 큰 소리로 말한다. 그러자 막내아들의 순한 웃음이 내내 그리웠던 그녀의 얼굴에 서운함이 얹힌다.

그 표정을 본 활달한 둘째 며느리가 그녀에게 ‘할매, 할매 오래 살았지요?’라며 장난을 건다. 그 소리를 들은 여자가 잠시 눈을 감더니 ’그저 한 사나흘 산 거 같다...‘라며 진심인 듯 농담을 한다.

’ 아이고, 욕심도 많아라...‘ 둘째 며느리가 짓궂게 눈 흘기며 받아치자  마당에 선 초로의 자식들이 그 말에 와- 하고 웃는다.     

늦가을 바람에 여자의 성긴 머리 한 두올이 설핏 날린다. 아닌 게 아니라 지나간 모든 날들이 그저 몇 밤의 꿈처럼 짧고도 아득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저 너머 앞산, 막내아들의 무덤가에 갈대가 가을 춤을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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