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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아 May 06. 2022

이른 여름의 찬가

                

이른 여름이 뭐 그리 좋냐고 물어 온다면 그만해라 이제 됐다고 할 때까지 그 이유를 말해 줄 수 있다. 그만큼 나는 초여름을 사랑한다. 서울에서 초여름이라고 해봐야 변덕스럽고 으슬으슬한 봄이 지나고 장마가 시작되기 전까지니 한 달 반 남짓 참 감질날 만큼 짧게 지나간다. 그나마 장마가 일찍 시작되는 해에는 장 열리자 폐장이므로 망한 거나 다름없다. 그만큼 귀한 그 시간이 내가 좋아하는 계절이다. 이 계절을 위해 봄이 가고 꽃이 지는 것은 하나도 아쉽지 않다. 세상은 이제 곧 진정한 풍요를 앞두고 있으므로.


초여름은 바람이 더는 거슬리지 않는 것으로 시작된다.

살랑대는 감촉의 원피스는 맨살에 닿아 ‘너는 여자야’하고 말해 주는 것 같다.  얼음이 든 음료를 쪽 빨아들여도 시리지 않고, 설익은 복숭아가 풍기는 풋내조차 달콤하다. 오랜만에 꺼내 신은 질감 좋은 가죽 샌들에 올라선 맨발은 무엇보다 자유롭다.     

설핏 내리는 빗줄기 후 올라오는 흙냄새는 또 얼마나 섹시한 향취를 풍기는지...     

속옷을 입지 않아도 장기가 굳지 않아서 편안하고 대지는 푸른 잎의 수분으로 더 이상 마른 먼지를 일으키지 않는다.




잠에서 깨자마자 활짝 열 수 있는 창밖은 또 어떤가? 

좋은 계절을 아는지 동네의 여린 생명들은 아이들이건 애완견이건 모두 빨리 나와 공원을 산책한다. 잔디는 푸르고 잔디에 뿌려지는 물줄기는 투명하다. 

이 계절, 린넨의 서늘한 질감은 공기가 드나들 수 있도록 낙낙하면 더 좋은데  

살과 천의 그 내밀한 틈사이로 자유로운 바람이 거침없이 드나든다. 

점심에는 차가운 면을 먹을 수 있고, 저녁에는 따뜻한 탕을 즐길 수 있다.      

이처럼 적절한 공기와 기온은 초여름 밤을 특별하게 만들어 준다. 서서히 저물어 가는 하늘색은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수만가지의 색으로 물든다.  창밖으로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나 음악의 여운은 지극히 여유러워

밤늦도록 바깥 벤치에서 수군수군 밀담을 나눌 수 있는 분위기를 제공한다. 이때 서로의 비밀을 공유해도 초조하거나 불안하지 않은 건 날씨가 주는 마법일 수도 있다.

루프 탑의 작은 전구는 별 못지않게 빛나고 한껏 차려입은 여자들의 어색한 오만도 기꺼이 용서된다. 


그리고 초여름에 만난 사람과 연애를 시작한다면 두고두고 좋은 기억으로만 남을 수 있다. 여자는 춥지 않아 날카로워지지 않을 것이고 남자는 덥지 않아 성급해 지지도 않을 테니 사랑은 단 과육처럼 천천히 익어갈 것이다. 서로에게 너그러운 그들은 여름밤에 춤을 춰도 좋고 영혼을 나누듯 손을 잡아도 좋다. 음악소리는 더 멀리 포물선을 그리듯 퍼지고 술을 마시면 모두 이쁘게 취한다. 긴장은 적당히 이완되어 감미로운 키스로 이어질게 분명한데 그건 인상적인 초여름의 풍경화가 될 것이다. 이른 여름은 그렇게 끝도 없는 선물 보따리를 펼쳐놓는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면 어떤가? 

구경꾼이어도 이른 여름은 충분히 낭만적이다. 

나는 이 계절 가장 가벼운 옷을 입고 끝도 없이 산책을 할 것이다. 골목골목 거리거리를 기웃거리며 스산했던 겨울날의 단절감을 걷어낼 것이다. 어쩌다 쾌적한 바람이 훅 불어오면 마음속 켜켜이 얼어있던 감정들도 잔 조각들로 간단히 흩어져 버릴 수 있다. 

이러니 또다시 내게 찾아와 줄 이른 여름은 완벽한 축복이다.

이제 곧 그 계절이 다가온다. 예외 없이 가슴이 설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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