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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병우 Nov 27. 2022

터널 속의 시간

터널에는 출구가 있다

터널을 마주하다


6년 전, 2월. 대학을 졸업했다. 지금이나 그때나 대학생들의 지상 최대 과제는 취업이다. 요즘은 대학 내에 창업 프로그램이나 동아리가 많이 생겨서 취업 외에 다른 길로 가는 학생도 많아진 듯 하지만, 취업이 기본 옵션인 건 여전하다. 그럼에도 당시의 나는, 지상 최대 과제는커녕 그걸 딱히 과제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전공 공부는 열심히 했지만, 취업 자체에는 다소 안일했었다.


대학교 3학년 때부터 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해서 약 3년 동안 수험 생활을 했다. 2013년 무렵에는 공무원 시험의 인기가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어떤 직렬은 경쟁률이 세 자릿수까지 치솟았고, 내가 응시했던 직렬도 비슷했다. 친구나 후배 몇몇은 휴학을 하고 노량진 학원에서 공부를 했지만, 난 학교에서 계속 준비를 했다. 전공 공부와 수험 공부 둘 다 잘하고 싶은 욕심, 노량진 수험 생활에 대한 거부감, 공무원 시험공부의 목적 상실 등이 복합적으로 겹치면서 점점 지쳐갔다. 졸업할 무렵에는 '올해 시험에서 떨어지면 더 이상 공무원 시험공부는 하지 않는다'라고 결심하게 됐다. 9급 시험이 4월에 치러졌는데, 결국 불합격을 했다. 수험 생활은 이로써 막을 내렸다.


문제는 취업에 필요한 '스펙'이 1도 없었다는 것이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답시고 토익, 봉사활동, 동아리, 인턴 등 대학생이 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을 등한시 한 대가였다. 더 큰 문제는 하고 싶은 일이 딱히 없었다는 사실이다. 전공을 활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 정도였을 뿐.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더니 그때 내가 딱 그런 모습이었다. 터널 속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 Photo by Alexander Mils on Unsplash



터널 밖으로 나가자, 제발


어느 날, 노는 김에 영어를 제대로 배워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처음에는 집에서 강남의 학원까지 왔다 갔다 하며 배울 계획이었는데, 어떤 바람이 불었는지 서울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부모님께 이왕이면 서울로 올라가서 영어도 공부하고, 구직활동도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그 주에 곧바로 서울에 가서 하루 종일 원룸을 알아봤고, 저녁 무렵에 신림동에 있는 방을 계약했다. 일주일 후에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서울로 올라간 후, 자취방에 짐을 풀었다. 영어 학원만 다닐 계획이었던 게 서울에서의 독립생활로 이어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첫 자취 생활에 그저 설레는 마음뿐이었다.


영어 학원을 등록하고 아침 7시부터 하는 원어민 스피킹 수업을 들었다. 동시에 구직 활동도 바로 시작했다. 무직 상태인 데다가 대학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번 돈 몇백 만 원 정도만 가지고 올라갔던 상황이라 당장 급한 불은 꺼야 했으니까. 대학 생활 동안 손 놓고 있었던 '지상 최대의 과제'가 비로소 내 현실 속으로 들어왔다. 인생의 짐은 결코 가벼운 법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첫 경험이었다. 그 무게를 고스란히 느꼈을 때, 터널 밖으로 조금씩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더 이상 어두운 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긴 터널에도 끝은 있다


스펙이 거의 없다 보니 쓸 수 있는 카드는 '전공' 하나였다. 다행히도, 원하던 학과로 입학해서 대학 생활을 하는 동안 전공 공부를 열심히 한 덕분에 학점은 나쁘지 않았다. 주변에서 법학과는 취업에 유리하지 않다고 말했지만, 전공을 충분히 활용하는 방향으로 구직 활동을 하면 가능성이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물건을 팔 때 고객층을 타기팅하는 것처럼 나라는 사람을 써 줄 회사를 타기팅했다. 전략을 세우고 한 달 동안 법률사무소 십여 군데에 입사지원서를 제출했다. 거의 대부분 서류에서 떨어지고 면접 단계조차 밟지 못했다. 월급이 120만 원으로 책정된 국선 변호사 사무실에도 지원할 정도로 절실한 마음이었다. 어떻게든 일해야 했으니까(월세가 50만 원이었다). 국선 변호사 사무실도 불합격하고 나니 다시 지쳐갔지만, 결론은 '어떻게든 취업하자'로 정해뒀기 때문에 할 일은 계속 지원서를 제출하는 것 말고는 없었다. 그렇게 11월 말이 되었고, 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는데, 왠지 얼마 전 면접 본 회사인 것 같아 바로 전화를 받았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그렇게 나는 8개월의 백수 생활을 끝내고 첫 취업에 성공할 수 있었다. 마땅한 전략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일단 시도해보는 게 최선의 전략이다.



터널은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지만


6년 전에만 터널을 만난 건 아니다. 살면서 수시로 길고 짧은 터널을 마주했고, 의지의 힘으로 또는 시간의 힘으로 빠져나오길 여러 번. 그럼에도 터널은 언제든 또 맞닥뜨릴 수 있는 존재다. 어차피 또 만나야 한다면 답은 사실 하나뿐이다. 빛이 보일 때까지 출구를 향해 달려 나가는 것. 어둠이 한없이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답을 찾고자 하는 의지도 약해지고 말 것이다. 요즘도 때때로 여기가 터널인가 싶은 느낌이 든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출구를 향해 가는 중일 테고, 언젠가 다시 빛을 만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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