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속의 인간
큰바위 얼굴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다. 내 학창 시절에는 교과서에 실렸던 소설인데 내용은 대충 이렇다. 어니스트라는 주인공이 마을의 영산에 있는 큰바위와 닮은 성인을 찾아 평생을 해맨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봤더니 본인이 그 큰바위와 닮은 성인이 돼 있더라는 싱거운 이야기다. 이 소설에서 정의하는 성인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인간이다. 그래서 주인공의 이름이 어니스트.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참 심플하다.
당시에 그렇게 감명깊게 본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큰바위 얼굴을 닮은 성인의 캐릭터에는 뭔가 끌렸나보다. 어떻게 보면 멋진 말이다. 어느 순간부터 나도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인간이 되려고 진지하게 노력했던 거 같다. 어떤 때는 말을 먼저 던져놓고 그 말에 책임지기 위해 아등바등하며 그런 인물상을 만들어 갔던 거 같다.
뭔가 이런 식으로 성공 스토리를 썼으면 그럴싸한 이야기가 될 법도 했지만 현실에서 그러기는 쉽지않다. 말이 적은 타입의 인간이었다면 성공적으로 그런 삶을 살았을 수도 있었겠다 싶다. 하지만 나는 과묵한 성격의 인간이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내가 원하는 그래서 취하고 싶은 이미지들을 만들어 냈고 여기에 매달렸다. 어빙 고프만이 이야기했 듯 무대 위에 올라갈 가면 속의 캐릭터를 만들어 산 샘이다.
물론 현대의 많은 사람들의 상당수가 그런 가면을 쓰는 삶을 산다. 이는 본인이 처한 상황에서 마땅히, 혹은 불가피하게 떠맡게 된 역할 수행의 과정에서 발생한다. 그것이 불가피했든 본인이 의도했든 결과는 비슷하다.
누구나 자신이 이렇게 보였으면 하는 모습들이 있고 그런 모습이 자신의 본 모습인척 하는 경우들도 있다. 그런 모습을 양산해 내며 살기도 한다. 그것이 들통이 나면 거짓말쟁이나 허풍쟁이가 되는 것이고 들키지 않으면 능력자, 매력있는 사람이 된다. 가끔은 실체와 상관없이 이쪽이나 저쪽의 모습으로 매도, 추앙되기도 한다.
많은 카피본이 양산되면 어느 것이 오리지날인지 알 수 없게 되는 순간이 있다. 원래는 오리지날로부터 부여받은 페이크 자아를 가지고 임시적인 역할 수행을 하던 카피였는데 이게 반복되고 지나치게 많아지면 그 자체가 오리지날의 통제 범위 바깥으로 벗어나게 된다. 결국 무엇이 오리지날이었는지를 스스로가 판명할 수 없게 된다.
어빙 고프만은 각각의 역할에서 형성된 모습이 다 그 개체의 자아라고 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이들은 힘들어 한다. 이런 다양한 모습들이 자기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자기가 원하던 모습이 아니고 환경에 의해 강제된 모습이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기 힘든 경우가 있고 받아들인다 해도 자기의 오리지날을 부정하는 감정을 가질 수 있다.
이는 오리지날과 카피의 경계가 모호해진 상황에서도 동일하게 발생한다. 본인이 창조한 모습이지만 그것이 오리지날이 아님은 본인이 더 잘 안다. 그런 식으로 자가 복제가 일어나 경계가 모호해지는 지경에 이르면 오히려 이 상황이 주는 허무함은 더 극심해 진다.
이 문제는 근원적으로 해결될 수 없다. 사회는 한 가지의 역할을 수행해서 평생을 살 수 없을 정도로 다층 다면화 됐고 인간은 하나의 진실된 모습으로 살기에는 많은 욕망을 지니고 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추앙하지도 않고 때문에 그렇게 살고 싶어하는 사람도 없다.
이런 사회에서 인간은 갈등 속에서 살 수 밖에 없을까? 현재 나오는 대안들이라고는 소위 자존감을 올리는, 나를 사랑하고 내 오리지날을 지속적으로 부여잡기 위해 여가나 본인의 일상에 가치를 더 두는 이야기들이다.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