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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캄프카 Apr 07. 2021

외모에 대한 칭찬을 저어하다

성별과 싸움의 원인

한 팟캐스트에서 패널들이 여성의 외모를 칭찬하지 못하게 된 최근의 분위기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걸 듣게 됐다. 외모를 칭찬했다는 이유로 조금 과하게는 성인지 감수성을 지니지 못한 사람이 돼 버릴 수 있는 작금의 현실이 조금 안타깝다는 이야기였다. 남녀를 떠나 본인의 외모를 가꾸고 그러기 위해서 노력과 돈과 시간을 쓰는 것이 일상이 된 현대 사회에서 이렇게 칭찬을 저어해야 하는 상황이 희한하기는 하다.


하나 우리가 근원적으로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은 칭찬과 평가가 동의어가 아니라는 거다. 일상의 언어에서 외모를 다룰 때 부적절한 경우가 있다. 누군가의 외모나 외형을 평가하는 행위가 그렇다. 이를 지적하면 가해자는 칭찬이었다는 말로, 피해자를 생각해서 해주는 조언이라는 말로 책임을 피해 가려고 한다. 하지만 이런 회피가 가능한 것은 우리가 그 말의 진위를 파악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대체로는 위계에 의해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적 지위를 활용해 가하는 폭력이 이 문제의 실체고 이는 외모 칭찬을 하지 않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으로 완전히 해결되지 못한다. 실제로 우리가 이것이 칭찬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수 없는 경우는 드물다. 그럼에도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은 부족하고 외모에 대한 발언 자체가 터부시 되는 상황에 놓여있다고 본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지속되면 결국 외모와 관련된 모든 언행 자체가 일상에서 무례하고 비도덕적인 평가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이렇게 사람들이 자기 검열을 하고 발언을 삼가게 된다고 해서 외모 평가와 관련된 문제들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문제의 본질은 젠더 문제이고  젠더 문제는 차별의 문제기 때문이다. 여성 인권 운동은 거의 모든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고 중요한 사회 이슈다. 여성 인권 운동의 등장은 기존의 관습적 사회 구조가 남성주의적이라는 점을 반증하고 이렇게 보편적 양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관습적 사회 구조가 대부분의 사회에 만연한 현상이었다는 점을 뜻한다.  견고한 틀을 깨고 개선하기 위해서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한 것도 맞다. 다만 이것이 차별의 문제라고 한다면 단순하게 인식의 전환만으로는 변화가 나타나기 힘들다.


외모 평가의 본질은 대상의 가치를 외모로만 평가하는 악습으로 특히 여성을 대상으로 빈번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악습은 여성이 사회에 진출하는 과정과 활동을 하는  있어서 제약 혹은 차별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 대상을 도구적으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다른 가치를 배재한  외모라는 특정 가치만으로 평가한다면 결국 대상을 특정 상황과 조건에서만 필요한 존재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조건 (뛰어난 외모와 외형을 지니는 조건) 충족하지 못한 개체는 동등한 능력이나 지위를 가지고 있어도 자본의 배분에서 배제된다.


궁극적으로 이 구조적 문제는 모든 구성원에게 영향을 끼친다. 비단 모두가 이런 평가와 도구화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영역에서 만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도구화와 평가로 인해 제약과 차별이 발생하게 되면 표면적으로는 혜택을 받는 것처럼 보이는 남성 계층에게도 피해가 돌아간다. 현대 사회로 올 수록 분업화가 진행되고 개인에게 요구되는 역할이 증가했는데 그 의미는 개인이 짊어져야 하는 짐이 가중된다는 것이었다. 이를 완화시키기 위해서는 개인 간의 연대와 연결이 더욱 중요해져야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차별은 그 연결을 파괴하고 그로 인해 개인에게 과중한 부하를 가한다. 절대적으로 월등한 자본을 소유한 일부를 제외하고는 이 부하를 제대로 견디기는 힘들다. 때문에 이는 모두의 문제고 이 지점에서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여건이 되지만 현실에서는 갈등과 반목으로만 나타난다.


 문제에 감정이 개입된 것이 원인이다. 아니 모든 문제에 이해 당사자들의 감정이 개입   수는 없지만  문제에서 모든 담론은 감정을 기반으로 한다. 때문에 옳고 그름의 싸움이 되면서 인식이 주요 화두가 됐다. 문제의 원인을 기본적인 젠더 인식을 가지고 있지 못해서, 성인지 감수성을 지니지 못해서, 그래서 무관심하고, 이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고, 문제 해결에 소극적이라고 규정해 버렸다. 이런 결론 때문에 특정 발언이나 행동에  예민해진다. 그것이 상대 성별이면 더욱 가혹하게  논리가 작용한다. 남성 일각에서는 이에 대한 반발로, 하지만 비슷한 양태로 공격이 이뤄진다. 의외로 많은 남성들, 특히 젊은 남성들은 구조적 결함이 있다는 문제의식에 공감하지 못한다. 여성들은 이것을 공감 능력의 부재로 해석하지만 이는 실제로 그들의 경험에 기인한다. 아직 사회나 구조적 현실을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이들이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은 이론적이거나 관념적이다. 게다가 본인들이 경험해온 세상, 학교라는 울타리에서, 일정 정도의 '균형' '정의' 가시적이고 수치화돼서 존재하는  구조에서 이들은 상대방이 이야기하는 차별과 문제점을 찾지 못한다. 게다가 언론을 통해 접하게 되는  이슈는 감정을 자극하는 담론 기반해 유통되기 때문에 이들은  문제제기 자체 ‘불공정하다고 여긴다. 여기서 절대로 맞닿을  없는 평행선 싸움이 시작된다.


이러한 싸움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슈를 사회적으로 다뤄지지 못하게 방해한다. 제대로  논의와 해결을 위해서는 담론에서 '인식' 제외해야 한다. 그래야  구조적 차별에 집중 해결과 대안을 논의할  있다. 구조의 문제, 시스템의 문제로 접근해야 하고 법과 제도의 틀에서 일단 문제의 해결을 시작해야 한다. 인식은  뒤에 따라오는 것으로 봐야 한다. 게다가  문제가 인식과 의식의 틀에서 벗어났을  비로소 연대의 물꼬를   있다. 젠더 문제를 말하는 사람들은 인식의 전환이 전제가 돼야 연대가 가능하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의 교육을 포함한  세계 어디에서도 차별을 정당화하지 않고 약자를 박대해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시스템에서 길러진 구성원의 다수는  의식의 영향 하에 있다. 다만 그들이 차별에 맞서고 약자를 위해 연대를  공감이 필요하고 이해가 필요하다. 이러한 이해와 공감은 윽박이나 강요로 형성되지 않는다. 전략이 바뀌어야 한다.  


차별의 구조로 이익을 보는 쪽은 따로 있다. 윽박과 강요와 공격의 대상이 이쪽으로 향해야 하고 그렇게 프레임을 형성해야 한다. 극단주의를 배제하고 이성과 논리로 소통할 수 있는 자리를 지속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 문제가 성별 갈등, 세대 갈등, 계층 갈등이 되는 것은 희한한 일이다. 그 결과로 외모의 가치를 그 어느 때보다 중요시하고 이 가치를 위해 그 어떤 시대보다 많은 돈을 투자하는 현대 사회에서 이에 대한 칭찬을 못하고 검열을 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이르렀다. 이러한 모순은 빠르게 해결해야 한다. 비합리는 해소의 과정이 없으면 누적되고 결국 폭발한다. 이것이 폭발하게 되면 이 문제의 본질과 해결책으로의 길은 다시금 한발 멀어지게 된다. 전략이 필요하다. '정의'를 참칭 하는 당위적 명제는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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