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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캄프카 Jan 09. 2022

뒤늦게 새해 복 많이 받음을 생각하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12 말부터 1 초순까지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들에게, 만나는 사람들에게 의례 이 말을 던진다. 가끔은 너무 반복적으로 영혼 없이 던지는 듯하여 약간의 변주를 주기 하지만 결국 구관이 명관이고 상투적으로 쓰는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연말이 되면 벌써부터 새해를 기다리는 사람, 기대감을 갖는 사람들로 인해 사회 분위기 들썩들썩해진다. 비록 코로나19라는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질병의 영향으로 작년과 올해의 분위기는 예년의 그것과 조금 달랐지만 그럼에도  시기가 주는 감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새해를 기념하는 행사는 모든 문화권에서 관찰되는 보기 드문 공통적 문화 특성이다. 언제부터였을까 궁금했지만 그 연원을 알아내는데 개인적 역량이 미달했다.


시간과  해의 구분은 사실 대단한 발견이었다. 시간을 측정하고  흐름을 계산해서 계절의 변화와 기후를 예측하는 부분은 농업에서의 안정적 소출을 위한 통치 기반이었다. 때문에  측정과 구분 철저히 필요에 의해서 이뤄졌다. 반대로 해가 바뀌는 것에 대한 의미(대체로 긍정적 의미) 만들어진 관념이고 관습적 감성이다.


생성의 원인이야 어떻든 간에 실체가 존재하면 그가 지니게 될 상징성은 무한하게 펼쳐진다. 새롭게, 새로운, 다시 시작 등등의 상징성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다


Hope, it is the quintessential human delusion, simultaneously the source of your greatest strength and your greatest weakness. -The Matrix Reloaded-

희망이라니. 인간이 가진 환상의 정수임과 동시에 너희들의 가장 큰 강점이자 가장 큰 약점이지.”


희망은 사람을 큰 기대와 행복 속에서 계속 살아가게도 하지만 거대한 절망에 빠뜨리기도 한다. 사람을 만나고 인사를 주고받고 식사와 술을 나누며 지나간 한 해의 회포와 다가올 한 해의 기대감을 나눈다. 이러한 푸닥거리는 하나의 의식으로 치러진다. 이게 끝나면 힘차게 한 해를 시작할 수 있을까? 그것이 하나의 믿음처럼 보일 정도다.


새해의 들뜬 인사와 분위기에 대한 회의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모두에게 새해는 기대되고 설레는 시간이 아니다. 진짜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사람들에게 새해는 일감을 찾기 힘든 고통의 시간인 경우도 있다. 각종 구호의 손길이 있지만 그 따스함이 모든 이의 모든 고통의 서릿발을 녹여주지는 못한다.


사실 새해맞이의 무용론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잘못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어차피 이런 담론은 무의미하다. 존재의 부정은 가장 쓸데없고 부질없는 낭비다. 다만 새해가 주는 다양한 상황에서의 괴리는 허망한 감정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삶은 개체 내에서도 요동치지만 개체 간에서도 요동친다. 그래서 변화무쌍하고 이 때문에 한 두 명제로 정의를 내릴 수 없다. 모든 괴리의 시발점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흥미롭든 불쾌하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인생은 어쩌면 그걸 배워가는 과정일지 모르고 추측컨대 대부분의 인간은 죽을 때까지 그걸 익히지 못할 것이다. 이런 이해 또한 내가 한 살을 더 먹었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것이었을까?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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