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마 신궁, 조선통신사 상륙기념비
곧 비가 내릴 것 같은 하늘이다. 날씨가 좋을 수만은 없는 게 여행이다. 비가 오다가도 반짝 해가 나기도 하니깐. 인생도 그렇지 않은가. 어두컴컴하다가도 어디선가 빛이 들어오는 출구가 흐릿하게 보이기도 하니깐.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처럼 살다 보면 나도 꿈꾸는 삶에 다가가지 않을까 생각했다. 지출을 아껴 저축을 했고, 저축한 돈으로 재테크도 했다. 열심히 했다. 공부도 하고, 절약도 하고, 비난 섞인 욕설도 많이 들었다. 성공을 위해 거쳐야 할 관문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부터 힘이 들기 시작했다. 버거웠다. 자산은 조금 늘어났고 마음은 텅 비워졌다. 조금 늘어난 자산에 비해 잃어버린 게 너무 많은 나를 마주했다. 이게 맞는 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건가. 문득 허무가 왔다. 삶에 대한 무의미였다. 의미가 없는 삶이었다. 헛헛한 마음을 둘 곳이 없었다. 수없이 두리번거려도 그 자리였다. 아무것도 없는 허무였다.
딸에게 따뜻한 라떼를 건네주는 아빠의 손길이 보였다. 어느 음료 광고의 한 장면이다. 따뜻한 라떼 한잔이 딸과 아빠를 마주 보게 했다. 거창한 게 아니었다. 따뜻한 라떼 한잔이었다. 그 순간 나에게는 따스한 라떼 한잔이면 충분했다.
보슬보슬 소리 없는 보슬비가 내렸다. 애매한 비가 내렸다. 우리는 비를 맞으며 걸었다. 비는 어느 순간 존재가치를 알렸다. 우산을 쓰지 않고 걷기는 무리였다. 우리에게 그 순간 필요한 건 작은 우산 하나였다. 우산 하나면 충분했다.
부산에서 출발한 배는 시모노세키항에 도착했다. 복어로 유명한 소도시이기도 하다. 작고 아담한 도시다. 곳곳에 역사의 흔적들이 있었다. 우리가 마주한 역사는 조선통신사 상륙기념비다.
조선국왕이 일본으로 보낸 공식적인 외교사절단 조선통신사가 부산을 거쳐 시모노세키에 상륙한 것을 기념하는 장소다. 17세기 당시 쇄국정책을 하던 일본에서 유일하게 국교를 맺고 있었던 게 조선이었는데 일본 요청에 의해 조선 왕실이 외교사절단 500여 명을 11번이나 파견했다고 한다.
조선통신사가 건너왔던 뱃길을 따라 우리도 이곳 시모노세키에 상륙했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신사가 있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 신호를 기다렸다. 신호는 바뀌지 않고 시간은 흘려갔다. 복어 그림이 그려진 건물이 보였다. 귀여워 사진을 찍는데 신호가 바뀌었다. 남편과 아이들은 이미 신호를 건넜고 난 깜빡이는 푸른 불빛에 멈췄다. 곧 빨간불로 바뀐 신호등 앞. 차들은 지나가지 않았다. 나보고 먼저 건너가라고 손짓을 한다. 건너가지 못한 나를 보고 얼른 가족에게 가라고 손짓을 하고 고개를 숙인다. 고개를 숙여 감사를 말해야 하는 건 나였다. 오른쪽 사람들에게 고개를 한번 숙였다. 왼쪽 사람들에게도 고개를 한번 숙였다. 빠른 걸음으로 건넜다. 난 가족에게로 돌아왔고 차들은 지나갔다. 눈물이 찔끔 나려고 했다. 그들의 배려에 감동했고, 가족의 기다림에 안도했다.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건 눈물을 들키지 않을 순발력이었다. 비스듬히 쓴 우산 틈으로 빗물이 들어왔다. 몇 방울의 빗물이 얼굴을 적셨고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들을 손으로 닦아냈다. 자연스러웠다. 남편은 우산을 제대로 쓰라고 말했고, 아이들은 아무 말 없이 아카마 신궁 계단을 올랐다.
아카마 신궁은 헤이안 시절 3살에 즉위한 안토쿠 왕과 그의 가문이 일본의 패권을 놓고 전쟁을 했다. 전쟁으로 세력이 약해지며 그의 외할머니와 함께 도망 다녔다. 막바지에 들어선 해전 전에서 헤이시 일파가 패 하자 외조모가 가문의 보검을 들고 만 6살이 된 어리 외손자 왕을 끌어안고 간몬해협에 몸을 던졌다. 그는 "파도 속에도 도읍이 있습니다. 우리 같이 용궁으로 갑시다"라는 유언을 남기며 뛰어들었다고 한다. 한때 황후를 배출하던 힘 있던 가문이었으나 역사 속으로 사라진 헤이시 가문과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 한 어린 안토쿠 왕을 기리기 위해 신사 안에는 안덕천황릉과 헤이시 일파 패를 모시고 있다.
세 살 안토쿠 왕에게 필요했던 건 어쩌면 왕관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꿈만을 붙잡고 살기에는 시간이 부족하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 난 달달한 커피 한잔이 필요하다. 밖에 비가 오니깐 커피 한잔이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