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택 통역사의 한 달

by 박모카

벌써 재택 통역사로 일한지 한 달 쯤 되어간다. 3개월 시한부 암선고를 받는 사람에게 통역을 해주는데, 본인이나 가족들은 오히려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이후로도 몇 번의 암 선고를 내렸지만 다른 분들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오히려 암에 대해 몇 번 얘기해보셨던 분들은 '저는 아직 죽을 준비가 안됐어요.', '난 아직 안돼요.', '내 기억력이 감소하는게 싫어요'라고 하셨다. 뭔가 내가 30대가 되면서 생각했던 것과 유사한 느낌이라서 경건한 마음이 들었다.


통역 서비스를 제공 받았던 분 중, 장애등급이 있어 보이는 사람이 있었던 적도 있다. 말을 더듬더듬 하셔서 평소보다 더 주의를 기울여야 겠구나라고만 생각을 했는데, 통화 마지막쯤에 '제가 말을 잘 하지 못해요. 통역해주셔서 감사해요.'라고 해서 머리가 울리는 느낌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내가 중간에 인내를 가지지 않고 다른 통역사를 연결해줬다면 이 분에게는 큰 상처가 되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목수술 환자를 마주하는 일이 몇 번 있었다. 그들은 관을 통해서 가루로 된 음식만 먹을 수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말을 잘 하지 못했다. 전화를 처음 받았을 때 나는 그들이 의사선생님에게 불만이 있어서 말투가 불성실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상황을 파악하고 나서는 내 착각이 얼마나 심한지 깨달을 수 있었다. (물론 화를 많이 내는 고객도 있긴 했다.)



나 역시 한 달간 일하며 컴플레인이 2건 접수되었다고 한다. 한 건은 의사 선생님 성함을 잘 발음하지 못해서이고, 다른 한 건은 내 대답이 느리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내 문제라기보다는 당시 전화를 받았던 사람의 문제인 것을 알기 때문에 (컴플레인이 들어오면 검증을 위해 감독이 파견되는데, 감독이 내 전화를 들어본 결과 내 편을 들어주었다.) 크게 신경쓸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나서 뭔가 말이 좀 더 안 나오고, 움츠러들게 되는 버릇이 생겼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일을 시작하면서 있었던 긍정적 요소를 떠올려보았다. 이전에는 몰랐던 의학 용어를 더 잘 알게되었다. 대학원 진학을 위해서 아이엘츠 점수가 필요했었는데, 매일 리스닝과 스피킹 연습을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스피킹 결과는 6.5점/9.0점이 나왔다. 감독관에게 배신을 당한 느낌이었다. 우리 대화가 잘 통했잖아!) 매일 다른 사람들의 삶의 파편에 내가 함께할 수 있는 것이 꽤 신이 났었다. 나는 평소에도 실화 소설을 읽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사는 이야기를 듣는 것은 꽤 흥미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통역 업무에 능숙해지면서 풋풋함은 사라지고, 사람들과 좀 더 기계적으로 대하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이것을 느끼는 상대 사람들 역시, 나에 대해 덜 친절해지고, 컴플레인을 걸기 시작한 것 같다. 내가 일을 시작할 때에는 모두 친절하고 관대하게 대해줬기 때문이다. 문제의 이유를 알았다. 일에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순리였다. 칭찬을 받는 소리함은 없고, 컴플레인 접수만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기에 내가 이것을 고치기 위해 크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