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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S Dec 04. 2023

신설 IT팀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스타트업에서의 달콤한 인정에 흐려진 판단력, 그리고 그 결말

달콤한 인정에 속아넘어가지 말자.


또, 프로젝트 진행

로드맵이 바뀌었어요?


외부에서 볼 일이 있어 일찍 퇴근하여 카페에서 작업 중이던 때. 

CTO님에게 전화가 왔다. 오후에 긴급 회의를 하니 참석해 달라는 말씀이었다.


"오전에 팀장급들과 논의해서 정했습니다. A 프로젝트는 잠정 보류하고, 내년의 최우선 목표를 C 프로젝트로..."


말씀을 가만히 노트에 적다가 나는 기가 막힐 수 밖에 없었다.

팀에 가장 먼저 합류했던 내가 4개월 전부터 할 일 목록에 있었으나 우선순위가 높지 않으니 하지 않아도 괜찮다던 프로젝트. 그것이 바로 C 프로젝트였다.


게다가 아주 일반적인 구조의 기능을 가진 서비스다. '참신한' 기능이라고 해봤자, 그냥 UX 디자인을 다시 설계하는 정도일 것이다. 누구도 이 종류의 서비스에 다른 '참신한' 기능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냥, 자신의 필요를 충족하면 그만인 그런 종류의 서비스인 것이다.

이런 서비스를 내년까지 마무리하고 1년을 보내라고?


신입이니까, 이런 가벼운 프로젝트도 완전히 완성하면 좋겠다고 생각은 든다.

이제 디자인 시스템을 막 구축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그 시도로써 좋은 첫 프로젝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규 개발팀에 합류하면서 꿈에 부풀었던 내 과거의 4개월 간의 고군분투를 생각하면 속상함을 지울 수가 없다. A 프로젝트는 심지어 이제야 겨우 기획/디자인으로 참여하게 된 상황이다. 이제 막 기능 기획에 신나게 작업하고 외부 인터뷰를 잡고 업무를 쫙 진행하려던 찰나에 기운이 쑥 빠지고 말았다.



달콤한 인정이 낳은 오만의 씁쓸한 결말


CTO님은 나를 면접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음에 꼭 들어하셨고, 4개월 간의 회사 생활에서 내 편의를 많이 봐주시고 나를 많이 신뢰해주셨었다. 그런 대우에 들떴던 것인지, 나는 다소간 내 앞에 놓인 회사의 과제들에 대해서 많이 파악하고 있다는 착각을 해버린 것 같다.


그런 착각은 오만을 낳았고, 오만은 나의 판단력의 객관성을 흐리게 했다.

'이런 규모의 팀에서, 이런 스케일의 프로젝트를 n년 안에 제작이 가능할까? 이런 전략으로?'

라고 생각하던 초기의 의아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나도 어느 순간부터는 내게 떨어지는 업무 과제에 집중하여 현실적으로 내가 기획/디자인하는 이 A 프로젝트가 정말 개발이 끝까지 마무리될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다. A 프로젝트의 로드맵 상의 스케일을 미루어볼 때, 짧아야 3-5년은 걸릴 프로젝트일 것 같다. 지금으로서는 개발자를 더 채용할 계획이 당장 없으니 더더군다나.





에자일은 무법 지대가 아니다.

오히려 아주 정교한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 리더가 있어야 운영된다.


CTO님의 경력은 정말 삐까뻔쩍하다. 혹시 특정될까 구체적으로 말은 못하겠지만, 국내 대기업은 대부분 거치셨고 이름만 들으면 모두 아는 글로벌 IT 기업이 전 직장이셨다고 한다.

면접 자리에서 나는 CTO님의 경력과 무척 겸손하고 깍듯하신 태도에 감화되어 일하기로 결정했었다.

그러나 찐 스타트업에서의 업무 경험 뿐인 내가 느끼기에 CTO님의 모든 결정과 행동, 계획은 누가 뭐래도 워터풀한 성격을 지울 수가 없었다. 


CTO님은 내가 에자일에 대해서, 린 스타트업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마다 본인도 그런 조직 문화를 원한다고 매번 강조하셨지만, CTO님이 겪어오신 조직들은 모두 아주 엄격하고 Strict한 인사 체계와 조직 문화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대규모 조직이었을 것이다. 그런 곳에서 (개발)관리직을 맡으셨다면, 훌륭한 직원을 뽑는 기준과 노하우나, 조직 문화의 구축에 대해서 경험이 없으신 것이 자연스럽다.


문제는, 이 모든 조직 구축 단계의 허드렛일을 내가 직접 했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신나고 행복했으니 어쩌면 누이좋고 매부좋은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지금 내 기분은 썩 좋지 않다. 그간의 그 업무들이 결과적으로 IT 프로덕트로서의 성과를 내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물론 내게 있지는 않지만, 그동안 의심 하나 없이 믿고 따랐던 CTO님의 판단에 의한 것임이 조금은 실망감이 들고 만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지만

내 상사는 실수하지 않으면 좋겠다.


상사의 실수는 고스란히 아래 직원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프로젝트는 잠정 중단되고, 완전히 새로운 프로젝트를 또다시 백지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당장 해야 할 일이 매주, 매일 바뀌고 있으니 어떤 업무에도 진지하게 몰입하기가 어렵다.

물론 왈가왈부할 필요없이 그냥 하기로 마음만 먹는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이 즐겁지는 못할 것이다. 오히려 스트레스를 준다.(이게 일의 본질이긴 하다)


CTO님이 나를 회사에 데려다 앉히면서(?) 약속했던 것은 내가 원하고, 내 커리어에 필요한 좋은 프로젝트를 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것. 결과적으로 내가 원했던 프로젝트를 손에 넣었지만 전사적 우선순위가 거의 높지 않아서 뒤로 미뤄지고 있고, 내 커리어에 있으면 좋을 법한 규모있는 프로젝트들은 기획 자체가 잠정 중단되었다. 남은건 C 프로젝트처럼 내가 잘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딱히 흥미가 느겨지지도 않는 시시한 과제 뿐이다. 물론 잘 만들어 잘 운영관리하는 것도 멋진 성과일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흥미가 생기지가 않는다.


내가 입사할 당시에부터 있던 프로젝트였던지라 더더욱 아쉽다. 차라리 회사 입사 초기에 진행했더라면 지금쯤 개발에 착수하는 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러지 못해서, 이제는 나머지 모든 프로젝트들을 드랍하고 이것에 다시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4개월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가!

내 지적 호기심과 흥미를 자극하던 기상천외하게 다양한 프로젝트들은 다 어디로 사라져버렸는가!








호랑이굴,

아니 신생 IT팀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스타트업의 리더분들이 어떤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사람들을 가려 칭찬하고 UX 디자인을 지적하는 것은 당연히 아닐 것이다. 그냥 느끼는 대로 표현하는것일 뿐.


그런 말들에 일일히 믿음을 가지고 일희일비했던 내가 좀 우습다.

회사의 모든 일들이 갑자기 아득하게 느껴지면서, 프로덕트 디자이너로서의 나만 우두커니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순간이 상상된다. 그 때 나는 과연, 이 곳에서 최선을 다해서 경력과 성과를 쌓았다고 외칠 수 있을까?


그러고나니 내 작업물을 다듬고 작업 방식의 숙련도를 높히는 연습을 입사후부터 소홀히 했다는 것이 문득 느껴진다. 포트폴리오도 마지막 컨설팅 이후로 수정하지 못하고 있고, 매년 일정한 도메인 이용 비용을 내면서 사용 중인 개인 블로그도 완전히 완성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떠오른다.

이 모든 것들이 이토록 불안하고 우유부단한 회사의 일보다 중요하지 않은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나는 한 동안 이 회사의 사원으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그 모든 것들로부터 눈을 돌리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일지도 모르는 것들을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서 최소 1년은 버티기로 작정했었다.

처음에 MAX 3년 정도는 생각했던 것에 비하면 많이 줄었다. 그래도 막연한 목표보다는, 약간 머릿속에서 일정표가 그려지는 계획이 딱 좋은 것 같다. 1년이라면, 이제 8개월이 남아있다. 그 동안 나는 이곳에서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


- 디자인 시스템의 구축
- 2개 앱 출시/배포
- 1개 타블렛 전용 프로덕트의 기획/디자인 경험
- 비전산화된 업계의 데이터 정리 및 도메인 지식 확장


1년 동안 2개 앱 출시/배포라면, 많은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사이드 프로젝트도 출시/배포를 할 계획이기 때문에 포트폴리오로는 손색없는 프로젝트들이라는 생각은 든다. 문제는 나의 기술적 숙련도이다. 다른 무엇보다 나는 손이 빠르지 않고 단순 작업을 가능한 한 미뤄버리는 좋지 않은 습관이 있기 때문에, 이것 역시 고쳐야 할 성격으로 생각한다. 이 부분 역시도 이곳에서 좋게 습관화하는 것을 달성과제로 삼아야겠다.





외부 세계는 바꿀 수 없다.

바꿀 수 있는 것은 나 자신 뿐.


프로젝트의 진행 방향이나 계획, 사업 개편 등 내가 스트레스 받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은 외부 세계의 것이다.

나는 이것들에 내 결정권을 행사할 수도 없고, 딱히 경험에 기반한 유의미한 인사이트가 있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나는 서비스 기획자도 아니니, 그것들을 썩 잘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나는 외부 세계의 것들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불안감과 실망감을 느끼고 만다. 또 욕심에 의해 내 할 일 너머에 있는 흥미로운 과제들을 욕심부리고 만다. 이 주기가 썩 완전하지도 않아서, 어느 과제를 끝까지 완성하기도 전에 다른 과제로 눈이 돌아가고 만다.


지금 몸 담고 있는 회사에서의 내 역할은, 이러니 저러니 해도 '신입' 프로덕트 디자이너이다. 

이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려 부담감을 가질 필요도 없고, 프로젝트가 엎어지거나 진행이 더딜 때 자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나는 내게 필요한 경험을 수집하고, 내 식대로 정돈하면서 회사의 과제를 하나씩 무심껏 처리해나갈 뿐이다. 그리고 그 끝은 (회사없이) 오롯이 창대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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