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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전 Sep 01. 2021

교사는 증언을 해야 한다.

프레이리의 교사론

  교사는 무엇을 가르칠까 |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을 의미한다. 무엇을 가르치는가는 그가 전공한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나는 대학에서 역사교육을 전공하였고, 학교 현장에서 오랜 기간 동안 역사를 가르쳤다.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할 때면 '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칩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니까 역사교사는 나의 정체성이다.


  처음 교단에서 가르칠 때, 대학교에서 배운 내용만으로 수업을 하기에는 많은 부분이 부족했기 때문에 가르칠 내용을 더 공부해야했고, 다른 것에 신경 쓸 여유 없이 수업시간에도 주로 역사적인 내용을 가르치는데 치중했다. 그래서 이미 밝혀진, 많은 학자들이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교과서를 통해서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그러다가 역사의 개괄적인 내용을 내가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었을 때는, 교과의 내용보다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하는 교수방법의 문제에 치중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지금도 많은 역사교사들이 도대체 이 많은 내용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가르쳐야하는가하는 문제를 고민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뒤 여러가지 다양한 수업 방법들이 쏟아져 나왔고, 나는 그것들에 현혹되었다. 그렇게 한동안 '어떻게'에 매몰되어 허우적거리다 문득 깨달았다. '도대체 뭣이 중헌디?'


  2000년대를 강타했던 조벽 교수의 책 『나는 대한민국의 교사다』에 이런 짤막한 글귀가 있다. "학생은 수업을 받는 것이 아니고 교사를 받아들인다."


  사실 교과 시간에 배운 내용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면 대부분 잊어버린다. 나의 경우도 학창 시절에 배운 것들을 되짚어보면, 그때 그시간에 배운 내용들은 거의 기억나지 않고 선생님들의 이미지만 내 머리속에 남아있다. 근엄했던, 무서웠던, 열정적이던, 명랑했던, 좀 이상했던, 앞뒤가 다르게 보였던, 닮고싶지 않았던, 그냥 싫었던 등의 이미지말이다. 즉 학생이 수업을 받는 것이 아니고 교사를 받아들인다는 말은, 물론 교과내용도 기본적으로 배우겠지만, 그것보다는 교사가 지니고 있었던 어떤 정서적인 부분이나 옳고 그름에 관한 문제 혹은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 등의 측면을 더 많이 배우게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사의 말 한마디나 일거수일투족은 중요하면서도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교사는 증언을 해야한다 |


나는 증언(testomony)이 진보적인 교사들에게
지속적이고 일관된 담론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프레이리는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교사들의 '증언'이라고 말하고 있다. 증언? 증언은 법정에서나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프레이리의 글을 읽고 좀 의아했다. 아니 무슨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 증언씩이나 필요하나? 프레이리는 삶 자체가 투쟁인 사람이라 극히 소시민으로 살고 있는 나에게 어떤 부분들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증언(testomony)'이라는 단어였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그의 글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의미한다.


  나는 증언이라는 단어를 오랫동안 곱씹어보고, 그 부분의 내용을 여러번 읽어본 후에야 프레이리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증언이라면 '사실을 말로 증명하는' 것이다. 즉 교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항상 사실에 바탕을 두어야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실천 또한 어려운 말이다. 그는 말로 하는 증언과 행동으로 하는 증언 가운데서, 더 강력한 것은 행동으로 하는 증언이라고 말하며 '가르치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교육실천은 하나의 재앙'이라고 일침하고 있다. 즉, '내가 말한 것은 행하되, 내 행동만은 따르지 말라'는 식의 말은 교육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과 행동을 언제나 일치시킨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내게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무엇을 하리라 외쳤던 것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리고 나의 생각 또한 늘 물흐르듯이 바뀌고 있으니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생각이 다를 수도 있다. 어제 말한 것을 오늘 지킨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학교에서의 '교사'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교사로서의 말 한마디가 자신에게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수백 수천명의 아이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므로 교사로서 말을 할 때는 마치 법정에서 증언하듯이 말을 해야한다는 의미일것이다. 게다가 행동까지 일치해야한다니! 와우!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관계 |


  그렇다면 교사는 학교에서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수업시간에서도 나의 계획과는 무관하게 '나'를 가르치고 있다면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해서 프레이리는 '증언'을 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관계는 가르침, 배움, 알고 가르치며 배우는 과정, 권위, 자유, 읽기, 쓰기, 가르치는 사람이 소유한 미덕, 배우는 사람의 문화적 정체성과 그에 대한 존중 등의 복잡하고 근본적이며 어려운 문제들이 연관되어있다.


  그리고 프레이리는 겉으로 어떤 교과를 배우든지 배우는 사람들이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낼 목적으로 치열하게 싸우면서 결의를 다지고 가치 있는 것을 달성하는 데 관심을 쏟게 만드는 최선의 방법이 바로 '증언'이라고 말하고 있다. 교사가 '증언'을 실천함으로써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관계를 '서로 존중하는 민주적 관계'로 정립할 수 있고, 서로 신뢰를 다지며, 자신들의 학교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학교를 희망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교과로 확장을 시켜보면, 역사교사는 역사 속에서도 증언을 해야한다는 말이다. 역사 교과서에 적혀있는 내용이 거의 공식화되기까지에는 많은 사람들의 연구와 해석을 거쳐서 이루어진 만큼,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또는 그것을 읽는 사람에 따라서 또 다른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언'해야 한다. 때문에 교과 내용이 사실인 것처럼 가르치기 보다는 하나의 관점으로 가르치며 직접 해석해보도록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 '증언'을 실천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만약 교사가 가르치고자하는 '어떤 하나의 가치'가 있다면, '교사의 행동'이나 '말', '교과 내용' 등은 그 가치를 가르치는 데 필요한 도구들이 되고, 프레이리가 강조하는 '증언'은 바로 교육실천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 된다.


  그리고, '교사의 증언'은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관계까지 정립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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