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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Dec 22. 2023

동지와 함께 새 날

feat. 팥죽

작년 동지에는 시골 엄마집에서 팥죽을 함께 끓였었다. 딸이 와서 마음이 동했지만 이젠 엄두가 안 난다고 주저하는 엄마를 같이하면 된다고 부추겨 한 일이다. 노인들이 은근히 기뻐하는 일은, 아직도 살아있네, 같은 무언가를 지금도 할 수 있다는 만족감이었다. 새알을 빚고 마당 백솥에 불을 지펴 팥죽을 쑤니 제법 옛 분위기가 났다. 오랜만에 해서 그런지 엄마도 약간 긴장하고 허둥댔지만 완성된 것을 보자 얼굴이 환해지며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먹기 전에 냉큼 한 그릇 떠서는 부엌 개수대 옆에 올려놓고 늘 그랬던 것처럼 조왕신께 안녕을 부탁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미련한 인간들 재수 있게 도와주이소.. 변함없는 이 기도가 말이 안 된다고 투덜거렸던 나이를 지나긴 지났나 보다. 아무것도 모른다, 미련한 인간들, 이 예사로 들리지 않았으니.


8시가 되어도 동쪽 하늘에 붉은 기운만 가득했던 오늘 아침, 다시 동지날이다.

느닷없이 빵 굽기와 동지 팥죽 쑤기 중 어느 것이 더 어려울까,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는 팥죽 끓이기가 빵 굽기보다 훨씬 쉽다는 게 문제다. 나름 열성을 가지고 시도한 빵 굽기가 한 번도 열과 성을 다해 본 적 없는 팥죽 쑤기보다 어려운 이유는, 주변에 빵을 굽는 사람을 못 보고 자랐기 때문이라고 별생각 없이 끓일 수 있는 팥죽이 대변하는 것 같다.


꼭 해 먹어야지 하는 결심이 없어도 때가 되면, 밥때가 되면 밥을 하듯 언젠가부터 동지가 돌아오면 팥죽을 끓이고 있었다. 오랜 시간 팥죽에 진심이었던 두 어머니(친엄, 시엄)를 가까이서 보았기 때문이리라. 가르치고 배우지 않아도 오감은 물색없이 뭘 어디다 새겨놨는지 때가 되면 들썩이고 행동하게 했다. 계량하지 않아도 오븐에 넣어놓고 노심초사 기다리지 않아도 생각대로 하다 보면 먹을만한 결과물이 나온다.


올해 팥죽 한 그릇은 이렇게 왔다. 낮에 로컬푸드 갔더니 팩에 담은 팥죽을 팔고 있었다. 지난주 팥이랑 마른 찹쌀가루 한봉지를 사놓긴 했지만 계획은 없었다. 게다가 새알이 들어간 팥죽을 위해서는 불린 찹쌀로 빻은 찹쌀가루가 필수라.. 그냥 있는 걸로 해보자라는 생각에 이른다. 이것이 빵과 다른 점이다. 될 것 같고 겁 없이 할 수 있는 것. 진짜 겁 없이 팥을 불리지도 않고(불리고 떫은맛 제거를 위해 초벌삶기도 해야 함) 압력솥에 넣어 푹 삶아 체에 으깨어 걸러 팥물을 만들었다. 팥물만 만들면 3분의 2는 완성된 것이다. 나머지 죽처럼 걸쭉하게 하는 재료는 남은 밥을 넣어도 되고 오늘처럼 마른 찹쌀가루를 익반죽해 새알을 비벼 넣어도 그럭저럭 되더라. 조미료는 단 하나, 소금으로 간 맞추기!



시대에 맞지 않게 집에서 팥죽씩이나 쑤어가며 나름 동지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건, 생뚱맞게 절망과 희망 같은 보이지 않는 걸 동시에 알아버린 어린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산골의 겨울밤은 길고도 깊어 동지 무렵이 되면 어둠이 물러가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에 종종 휩싸이곤 했다. 팥죽을 먹은 날 검지 손가락 손톱 끝을 내보이며 내일부터 이만큼씩 낮이 길어진다는 엄마의 말이 어찌나 쏙 꽂히던지, 그럼 이제부터.. 기분이 괜찮아졌다. 막막했던 어둠에 바늘구멍 같은게 뚫리는 듯 했다. 사실 1월은 더 추웠지만 낮이 길어지고 있다는 믿음은 아이가 살 수 있는 겨울을 있게 한 것이다. 이제는 기후변화로 혹은 나이 탓으로 겨울을 겨울로 살 수 있는 여유가 생겼지만 여전히 동지가 지나면 한고비 넘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세상 만물을 기의 변화를 가지고 설명한 서경덕의 <화담집>에도 동지는 새로운 변화의 시작이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밤은 어둠이며 음에 해당하고 낮은 밝음이며 양이다. 동지까지가 음이 길어진 지나간 세월이었다면 동지부터를 양의 기운이 늘어나는 새로운 우주 자연의 시작이라고 보았다. 나무뿌리가 흙 속에서 움트기 시작하는 소생의 순간, 늘 새 세상이 시작되는 지점, 어린 마음이 가졌던 희망과 통한다.

끝의 다른 말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평범한 진리가 동지에 담겨있었다.

내일부터 새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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