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고 보고 먹고
올해 텃밭 분양이 치열했대요.
백 명 넘게 떨어졌다는데…
이제야 인사를 나눈 옆번호 이웃에게 들은 말이다. 그럴 리가?? 잊고 있다가 부랴부랴 지원했는데도 당첨 문자를 받지 않았나. 읍이라 무조건 되는 거라고 추측했는데, 경쟁률이 높았다고?
작년에 설핏 이런 말을 들은 적은 있다. 중간에 그만두거나 풀매기를 게을리하면 다음 해 탈락이라는 조금 살벌한 말. 그래서 유심하게 되었다. 관리의 대상이 된다는 게 썩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어쩌겠나 손바닥만 한 땅이라도 몹시 필요한 걸. 눈에 띄지 않게 풀도 적당히 매었고, 관리인 아저씨 참견에 고개까지 끄덕이며 표정관리를 했다. 지난겨울, 장터 해장국 집에서 뜨거운 김에 얼굴을 박고 있다가 들은 낯익은 그분 목소리가 반가웠다. 나가는 사람 잡고 아는 체했더니 정작 그는 ‘누구시더라?’ 같은 표정이었지만 이해했다. 많은 사람들 중에 어떻게 나를 기억하겠어… 근데 나 왜 이러니?! 텃밭 맛에 중독된 자는 관계자만 보면 오지랖퍼가 될 수 있었다.
적고 보니 마치 텃밭을 얻기 위해 물밑 작업이라도 벌인 듯, 그리고 새 봄이 돌아오면 누구보다 텃밭에 먼저 달려갈 것 같은데, 실상은 다르게 나타났다.
한번 해봐서 나오는 여유는 아닌 나태함과 닮은, 그렇게 추운 날에도 꽁꽁 싸매고 온 데를 걸었던 바깥으로 향한 의욕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주변이 매일매일 온통 물먹은 연둣빛으로 번져가니 오히려 발길은 잦아들어 텃밭 가는 일마저 시큰둥 해졌다.
봄날은 굳이 가꾸지 않아도 물색없이 이쁜것! 애쓰지 않아도 주변이 알아서 굴러간다는 건 기운낼 필요 없는 것일까. 아니 기운 나지 않는 것일까.
그러면서 텃밭은 글 속에나 있는 듯 이른 봄부터 초록향을 솔솔 풍긴 봄새 작가님 텃밭이야기에 열광했다. 이른 새벽길을 떠날 때 은근히 올라오는 들깨알 크기의 경이로움 같은, 새벽 공기가 전해지는 문장들을 만나는 기쁨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러다, 앗, 나도 텃밭 하지.. 뒤통수를 긁는 기분으로 진짜 텃밭으로 나가 씨를 뿌려 놓고 쌈채소 모종을 몇천원치 사다 심어 놓았다. 자연이 아니기에 간소하게 간소하게.
시원하게 두어 차례 내린 봄비는 뒤늦은 텃밭녀 마음에 단비가 되었다. 눈뜨자마자 텃밭에 못 가 안달하던 그때가 돌아온 건 아니지만 궁금해졌다. 궁금해져야 간다!
라벤다, 양상추, 바질, 세 가지는 씨앗을 뿌려 놨는데, 반갑게도 바질이 제일 먼저 나오고 있다. 작년에 키 큰 채소들 밑에 뿌려놨다가 수확이 시원찮아 따로 바질 코너를 만들 정도로 여름 식탁과 정서까지 부탁하게 될 소중한 허브. 파는 모종이 슬슬 나왔지만 눈 질끈 감고 지나왔다. 저 아가들을 믿어 보련다.
미적거리다가 4월 중순에 심은 감자. 하지 감자인 셈인데 알이 들기 위해서는 90일이 필요하다는데, 장마 전에 파내야 되는데, 통으로 심어도 된다 해서 심어봤지만 여러모로 수확이 기쁘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작년에 집에 뒹굴던 감자싹을 그냥 한번 심어보았다가 줄줄이 무더기로 올라오는 기쁨을 맛보았다. 감자를 무지 좋아하는 옆지기의 작은 소망이 조금이라도 충족되길.
또 잊었다. 들깨 모종은 사지 않아도 어디에나 싹트고 있다는 것을. 쌈채소에 깻잎을 빠뜨릴 수 없어 두팟 사 심고 보니 역시 자연산 모종이 옆에 턱 앉아 있다. 점점 여기저기 올라오는 것들을 그대로 두면 아마 5평 땅은 들깨밭이 될 것이다. 농부놀음하는 나 같은 이들이 엄두가 안나 떨지 않은 들깨알들의 아우성을 받아 주련다. 내년에는 기억하여 살펴보고 모종을 안 사겠다는 말.
142번 밭의 터줏대감들은 명아주와 메꽃인 듯하다. 뿌리를 잘라 흩어놓으면 모두 살아난다는 메꽃의 막강한 번식력은 그렇고, 흔한 잡초일뿐이라고 생각한 명아주에게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었다. 옛사람들은 한해살이 풀인 이것의 줄기를 말려 지팡이로 썼다. 뿌리째 뽑아 삶고 말리고 기름 먹여 옻칠을 하면 단단하고 가벼운 지팡이가 되어 청려장(푸른 순이 돋는다는 뜻)이라는 근사한 이름까지 얻었다. 안동 도산서원에는 퇴계 이황이 쓰던 청려장 유물이 있으며 고령의 영국 여왕이 왔을 때 선물로 했다는 일화까지. 자연 상태로 두면 그렇게 크고 단단한 풀나무가 되어 쓸모있다니…근데 명아주야, 난 지팡이보다 채소가 필요한걸!
이것 또한 심지 않은 새싹인데, 아마 오이 호박 참외 같은 박과의 무엇인 것 같다. 키울까 말까. 모르고 키우는 것에는 조금 복잡한 마음이 든다. <아주 작은 씨앗> 그림책 속 의문의 씨앗을 심는 이의 의심과 기대감, 조바심, 기쁨처럼.
옆길로 새보면.. 사실 길은 연결되어 이것 또한 텃밭 가는 길에서 얻은 나팔꽃씨니까. 길 가다 색다른 나팔꽃이 보이면 가을에 꼭 씨앗털이를 하는 사람에게 어느 집 울타리에 또닥또닥 말라붙어 있는 봉긋한 그것들은 우연히 발견한 보물이었다. 꽃을 보지 않았지만 씨앗 꼬투리가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굵고 반듯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어 주섬주섬 따서 데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침에만 피었다 지는 나팔꽃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마루 창가에 쪼르르 놨다. 새싹의 기세와 크기가 만만찮다. 혹시 잭의 콩나무처럼은 아닐지라도 난간 살을 넘을 정도로 덩굴이 뻗치는 게 아닐까? 대비해 그물망도 준비해 놨다.
모종으로 심은 쌈채소들을 빠뜨릴 수 없다. 씨 뿌린 채소들이 거북이걸음이라면 그들은 토끼처럼 폴짝폴짝 뛰고 있다. 이번 봄은 빠르게 기온이 올라 더욱 속성이라 보는 재미에 벌써 먹는 재미까지 있다. 벌레도 먹지 않고 빤질빤질하게 잘 크는 상추류들을 보면 흐뭇하다가 조금 이상하기도. 도대체 종묘상의 모종에는 무엇이 장착되어 있을까. 첫 샐러드의 여리나 아삭한 맛은 천상의 맛에 가까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