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less but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계영 May 31. 2024

노인과 아이

feat 박완서, <소멸과 생성의 수수께끼>


읍에서 가까운 시골 마을로 종종 산책을 간다. 혼자 보다는 둘이서 가게 되는 이 동네는 ‘구슬처럼 맑은 샘’이라는 뜻의 지명을 가진 곳이다. 샘의 원천은 동네 중앙에 흐르는 넓은 냇가일 것이고, 그 냇가의 원천은 또 동네를 가까이서 둘러싸고 있는 높다란 산 일 것이다.

한정원 시인은 동네를 사랑하기 위해 동네를 걸었다는데, 우리는 그냥 걷다가 이 동네를 사랑, 비슷한 걸 하고 있는 것 같다. 동네뿐만 아니라 주변까지 들어와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가만히 생각하게 되니 말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문득 그 사실이 바로 앞에서 펼쳐지면 발견 같다.


지난 주말에는 이곳에서 이런 모습을 보았다. 마당이 훤히 보이는 어느 오래된 집을 지나는데 여자 노인 여러 명이 새순이 제법 파릇해진 대추나무 한 그루가 있는 마당에 두런두런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들의 전두엽은 헐거워지지 않았는지 큰소리 하나 나지 않는 도란도란의 분위기가 지나가는 행인에게까지 와닿아 미소 짓게 했다. 여자 시골 노인들의 외로운 등대 같은 삶을 알기에 더 인상적이었는지 모른다. 그러고 보니 이곳의 정취는.. 시골마을 특유의 쓸쓸함이 없다.

좀 더 가 보자. 동네 중간쯤 들어서니 광장 비슷한 곳에 귀한 아이들 소리가 들린다. 끌리듯 성큼성큼 다가갔고 또 귀한.. 동네 우물터를 만났다. 두레박은 없어도 우물물로 누구나 손을 씻고 물을 마실 수 있게 개량되어 있었다. 약수인지 페트병에 담으로 온 남자 노인이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고 연신 자랑이다. 지루할 정도로 자랑을 듣고 물을 본 김에 손을 씻고 세수를 하는 동안 여전히 아이들 소리는 주변에 깔려있다.

노인과 아이들, 우물터, 쓸쓸하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제야 읽고 있는 박완서 에세이들 중 <소멸과 생성의 수수께끼>가 떠오른다. 이 글에서 작가는 노인들을 보고 있으면 슬퍼진다고 정색하며 말한다. 어느 경우든 늙은이, 노인은 불쌍하고 측은하기 이를 데 없었다. 늙음은 거부할 수 없는 불행이다. 활짝 웃는 노인, 세계 정상의 권세와 지위를 가진 노인, 적극적으로 젊게 사는 노인마저도 모두 슬프긴 마찬가지였다. 의외였다. 대작가는 늙음을 관조할 줄 알았는데, 조금 다른 의미로 볼 줄 알았는데, 모든 게 심드렁하여 좋은 말 할 줄 모르는 내 늙은 엄마랑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하필 전화드려야지 마음먹고 있는 날 먼저 걸려 온 어머니의 목소리만큼 절절하게 슬픈 게 또 있을까, 문안드릴 겨를도 안주는 어머니의 자상한 목소리처럼 듣기 싫은 게 또 있을까,라는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리는 문장에서 알아버렸다. 딸 박완서의 마음을.. 늙은 엄마를 보는 세상의 딸들은 어쩌면 이리도 비슷한지..

또 그런데, 어떻게 살아도 슬퍼 보이고 불행해 보이는 노인들이 정말 행복해 보일 때는 어린 아이랑 있을 때라고 물 흐르듯 말하는 부분에서 작은 탄성이 나왔다. 그렇지..!

생명이 소멸돼 갈 때일수록 막 움튼 생명과 아름답게 어울린다는 건 무슨 조화일까? 생명은 덧없이 소멸되는 게 아니라 영원히 이어진다고 믿고 싶은 마음 때문일까? p155

처음과 끝이 만나 동그란 원이 되어 끝없이 순환하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한 집에 한 사람씩 남아있는 고향 마을 노인네들이 슬퍼 보이고 실제로 슬픈 이유가 다가온다. 그곳에는 미래, 다음을 노래할 만한 어린아이라곤 없다. 죽음만이 어른거리는 노인들은 함께 모여 이야기하던 시절을 까맣게 잊어버린 듯 하다. 돌아앉아 혼자서 들깨나 콩을 심어야만 코앞의 미래라도 조금 상상할 수 있는 것일까.

샘물이 여전히 촬촬 나오는 그 마을을 헬리캠으로 본다면 우물가를 중심으로 노인들과 아이들이 조화롭다. 한자리에 모이지 않아도 서로를 느끼며 각자의 자리에서 그날의 행복을 짓는다.


형제들 모임에 갔다.

늙고 아픈 형제들 틈에 새싹 같은 어린 사람이 끼였다. 큰언니의 막내 외손자. 태어난 지 2년이 채 안되었지만 걷고, 서로 눈을 맞추며 놀 수 있다. 이젠 꿀벌같이 사뿐히 이사람저사람 옮겨 다닌다. 따뜻하고 말랑하고 촉촉한 살을 부비며. 그러다 멀리 가고있다. 걱정이 많은 아픈, 늙은, 젊은 할머니들이 따라다니며 이젠 무거운 벌이 되었다. 표정은 모두 머리 위 푸른 하늘만큼 맑다.



* 박완서 에세이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 세계사, 2024

매거진의 이전글 너무 대낮의 5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