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원 자서전 <산돌 키우기> 중, 다시쓰기
밭이 한 뙤기도 없는 기호네 형 기철은
뒷산 정씨 문중 산지기 노릇을 하고 있었어.
대신에 편편한 잔등의 땅을 얻었지.
부지런한 기철형은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개간을 하는 거야.
소나무, 철쭉, 진달래, 노간주나무 따위를 곡괭이, 괭이, 삽, 톱으로 치고 자르고 파고.
나오는 돌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굴려다가 밭둑을 만들고.
기호랑 산에서 나무를 해오다 형을 만났어.
아이고, 요 꼬맹이들 내가 선물 하나 주지.
쑥내민 손에는
차돌처럼 생긴 돌이 있었어.
자라는 돌, 산돌 이랬어.
기호의 돌은 주먹 둘을 합친 크기만큼인 내 것의 두 배였지만.. 그래도 괜찮아.
내 돌이 말이야,
한쪽 모서리가 개 이빨처럼 쭈뼛쭈뼛
그 밑은 연한 자주색의 석영인데
끝부분이 희고 투명한 것이 무지갯빛까지 감도는 거야.
찐보라, 연보라, 남색, 자주색..아, 몰라몰라.
기철형이 산돌 키우는 법도 가르쳐줬지.
그늘진 땅속에 묻어놓고 쌀이나 보리 씻은 뜨물을 날마다 한 번씩 부어 줘야 해.
절대로 파보아서는 안되고 참을성 있게 기다리기!
산돌 키우는 사람은,
남의 못자리에 돌을 던진다거나
남의 집 감을 따먹는다거나
남의 수수모가지를 자른다거나
누구를 때린다거나
뱀이나 개구리를 잡아 죽이면 안 돼.
대신,
거지가 오면 후하게 곡식을 퍼주고
맛있는 것은 동무하고 나눠 먹고
책도 돌려 보고
모르는 것은 가르쳐 주고
싸우지 말고
양보하고...
그래야 그 돌이 쑥쑥 잘 자란단다.
그 돌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벌써 석영이 죽순처럼 자라 찐보라 유리 기둥이 담 위로 솟아올랐어.
쌀뜨물을 두 차례나 준 날,
산돌은 더 자라
석영 기둥이 햇빛을 받아 번쩍거리고 있고.
물론 모두 상상이야.
아직은 마당 가장자리 담 그늘 아래 묻은,
밥 짓는 작은 누님이 준 뜨물 반 바가지를 매일 받아먹는 산돌.
닷새 지나고
기호, 자기 손가락 한마디를 가리키며
내 돌은 이만큼 자랐는디, 니 돌은 얼마나 컸냐?
나는 아직 안 파봤다..
열흘 지나고
기호, 온 손가락을 내보이며
이만큼 자랐는데 니 돌은 얼마나 컸냐?
내 돌은 쬐금밖에 안 자랐어.(거짓말)
내가 심술을 부렸을까
거지한테 함부로 했을까
거짓말은 했네.. .
누구한테나 잘 웃어주고
어른들 심부름을 잘하고
누님에게 받은 뜨물을 잘금잘금 부어주었지.
그런데
니 돌은 얼마나 자랐냐?
이만큼 자랐어!
어디 보여줘 보여줘!
절대로 안 돼. 나는 그것을 어두컴컴한 데다 숨겨놨어.
.
.
.
.
.
기호도 나도, 사실은 산돌 키우기에 실패했지.
아이들은 누구든지 산돌을 키우다가 실패를 맛본다는 사실.
모두 거짓말을 했을 뿐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나는 어른이 되어 있더라고.
속절없이 자라지 않는 돌을 슬퍼하면서도 뜨물을 계속 부어주는 아이가 자란 어른.
내 나이 벌써 85이야.
지금도 내 뜨락에 산돌 하나를 묻어 키우고 있어.
내가 저 세상으로 떠난 다음에 보라색 자색의 유리 기둥처럼 자랄지 모르잖아.
보이는 것만 꿈꾸는 건 아니잖아.
*커버이미지/ <은하철도의 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