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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련작가 Oct 22. 2024

인육, 치욕, 철면피 남편

말이 넘치는 시대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의 발달 덕분이다. 이를 통해 누구나 자신의 사상과 의견을 공공연하게 대중에게 피력할 수 있게 됐다. 진정한 사상의 자유를 이룬 21세기에 그림자가 더 짙게 드리워진다. 그 어둠은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모두 말빚에서 비롯된다.     


말은 윤회한다. 감각기관과 오장육부로 이루어진 인간이라는 수레가 말을 한번 뱉으면, 세상에 퍼진 그 말은 다시 돌아와 수레 안에 담긴다. 수레가 그 작동을 멈출 때까지 그 무게는, 그 말빚은, 계속 수레 안에서 뒤챈다. 수레에 똥을 싣든, 금을 싣든, 그 무게는 같다. 추악한 말과 아름다운 말이 우리에게 다를 바가 없는 이유다.     


말빚을 지기로 따지자면 한때 내가 살았던 춘추전국시대 사상가들이 최고봉일 거다. 유학의 창시자인 공구 선생, 평등과 겸애를 말한 묵적, 그리고 장주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나. 우리 셋 모두 적잖이 말빚을 졌다. 그리해서 무거운 수레를 힘겹게 이끌고 언덕을 오르고, 또 오르다,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고.     


공구 선생은 생전 아내와 아들은 물론, 애제자들을 많이 떠나보냈다. 공구 선생보다 먼저 간 제자 중에는 오늘날 공문십철(孔門十哲)로 알려진 이들도 있었다. 그 가운데 공구 선생에게 가장 큰 충격을 안긴 죽음은 자로(子路)의 그것이다.      


자로의 용맹함과 공구 선생의 사상. 공구 선생은 자로를 제자로 받을 때 이미 그에게 죽음을 안긴 셈이다. 공구 선생 본인이 그 사실을 가장 잘 알았을 것이다. 주역의 대가였던 이였으니.     


도적처럼 살던 자로는 공구 선생의 말에 감화돼 그 문하로 들어가 인(仁)이니, 의(義)니, 예(禮) 따위를 배우고 익혔다. 자로는 훗날 녹을 받아먹었던 나라에 인과 의와 예를 다하기 위해 싸우다 죽었다. 창칼에 몸이 찢기며 죽은 자로는 죽기 직전까지도 “군자는 죽을 때도 관을 벗지 않는다”고 말하며 갓을 고쳐 썼다.    

 

그리고 자로의 시신은 젓갈로 담겨 공구 선생에게 보내졌다. 공구 선생이 인육을 먹었다는 헛소리의 유래다. 큰 충격을 받은 공구 선생은 그 뒤로 고기를 입에 대지 못하다가 자로가 죽은 이듬해 작고했다.     


본래 묵적은 하층민 가정에서 태어나 관직에 오를 수 없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목공 실력이 워낙 출중했던지라, 하급관리에 오르기에 이른다. 그의 사상은 모두 그의 출신과 인생사에서 다져진 말이다.     


묵적은 불합리한 신분제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의 사상을 평등과 겸애, 비공, 비악, 절용과 절장 등의 말로 정립했다. 그가 뛰어난 웅변술로 저잣거리에서 말을 내뱉자 위정자들은 분노했다.     

 

기득권과 하층민이란 분류를 없애야 한다, 빈부 격차가 없는 경제적 평등을 이뤄야 한다, 등의 주장은 묵적에게는 치욕적 형벌인 묵형(墨刑)이란 말빚으로, 후대 묵적을 따르던 묵가(墨家)들에게는 집단자살과 처자식까지 죽이는 가혹한 규율이란 말빚으로 돌아왔다. 모든 이가 모든 걸 포기한 사상이었으나, 오늘날 묵적의 말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 오래다.     


장주로 살았을 때 내 얘기를 해볼까? 오늘날 장자라는 이름으로 숭상받는 내 철학은 실상 비겁함을 안분지족으로 자위하는 이들의 도피처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장주가 그랬으니까. 장주의 말은 뭐 하나 진득하게 참아내지 못하는 철없는 남편, 철면피 남편의 교묘한 항변이요, 제자들이라는 머리검은 무리들과 한량처럼 어울리기 위한 고귀한 핑계였다.     


당시 글을 아는 이가 관직에 나아가지 않으면 생계는 불가능했다. 나는 벗들과 놀면서 말하기 바빴다. 대신 아내가 매일 쌀이나 구황작물을 조금이라도 얻으려 여기저기 구걸하러 다녔고. 가까운 곳에서 쌓인 빚이 많으니 점차 먼 곳으로 구걸해야 했고, 그렇게 아내는 병을 얻어 가슴을 붙잡다가 세상을 떴다. 오늘날로 보면 극심한 수치심과 우울증, 화병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성 악성종양이었을 거다.    

 

호접지몽(胡蝶之夢). 내 철학을 말할 때 많이 인용된다. 그런데 그거 아는가? 깨달은 이는 꿈을 꾸지 않는다. 평생을 동고동락하던 아내의 죽음 이후 나는 미쳐있었다. 그래서 아내의 장례에서 바가지를 두드리며 노래한 것이다. 道를 잃고 방황했던 시기다. 스스로 말한 깨달음이란 거대한 거짓말에 토악질을 했다. 그때 꾼 꿈이 호접지몽이다.     


위와 같은 얘기는 말빚의 최대 채무자들의 일부 사례다. 듣는 귀가 많아진 21세기, 글과 말로 무언가를 기록할 때 찾아올 말빚이란 채무가 더 무겁게 다가온다. 살기등등한 채자들이 복리로 불어난 말빚을 받기 위해 언제 찾아올지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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