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러스트』, 에르난 디아스
*본 글은 장편소설 <트러스트>의 내용 일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에르난 디아스의 장편소설 <트러스트>는 한 부부를 주인공으로 하는, 본인을 포함한 서로 다른 네 사람이 쓴 네 개의 글로 구성되어 있다. 같은 인물을 바라보는 네 개의 다른 시선이 겹치고 어긋나는 지점이 흥미롭다. 각자가 기억하는 대로 기술하고, 연출하고 싶은 대로 묘사한 인물을 머릿속에 그려가다 보면 독자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대체 진실이 뭐야? 하는.
책의 목차는 아래와 같다. 목차에 간단한 소개를 덧붙인다.
1. 채권(글쓴이: 소설가, 해럴드 배너): 베벨 부부를 모티브로 한 소설
2. 나의 인생(글쓴이: 남편, 앤드루): 위의 소설 <채권>의 내용 일부를 반박하려는 의도로 앤드루 본인이 작성한 미완성 자서전
3. 회고록을 기억하며(글쓴이: 대필 작가, 아이다): 위의 미완성 자서전을 앤드루의 구미에 맞게 완성하는 작업을 했던 아이다의 회고록. 그녀가 직접 취재하면서 알게 된 베벨 부부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4. 선물(글쓴이: 아내, 밀드레드): 앤드루 베벨의 아내 밀드레드 베벨의 일기와 메모 조각들.
네 가지 버전에 등장하는 베벨 부부는 때로는 조금, 때로는 상당히 달라 보인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어떤 글에서는 밀드레드가 사망하기 전 정신병에 걸린 것으로 나오지만, 다른 글에서는 암과 같은 육체적 질병(정확한 병명은 나와있지 않다)에 걸린 것으로 나온다. 치료과정과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여생도 다르게 흘러간다. 한쪽은 절망적으로, 다른 쪽은 그에 비해 평화롭게. 두 사람의 활동, 행동, 성격에도 조금씩 차이가 있다. 어떤 글에서는 천재적이고 무심한 인물로 묘사되던 앤드루가 다른 글에서는 아내를 질투하면서 의존하는 지질한 인물로 묘사된다. 밀드레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떤 글에서는 소극적이고 내성적으로 그려지는 반면, 다른 글에서는 좀 더 주체적이고 총명한 여성이었다는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진실이 무엇이든, 작품 전체의 흐름상 독자는 책의 뒷부분으로 가면서 처음 끼운 잘못된 조각을 바꿔 끼워가며 전체 퍼즐을 완성하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밀드레드가 쓴 4번 글에 가장 마음이 갈 것이다. 3번 글에서 드러나는 단서들과 맥을 같이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니었다는 점 때문에 더 그렇다. 독자를 상정하지 않은 조각난 일기와 메모 안에는 진실만이 담겨 있을 것만 같지 않은가? 게다가 밀드레드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의 문체에서는 자기가 보고, 느끼고, 들은 것을 아주 개인적인 차원에서 내밀하게 기록했다는 것이 느껴진다. 앤드루의 사무적이고 대외적인 문체에서는 느낄 수 없는 진솔함이 묻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밀드레드의 글이 정말로 진솔한 글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나? 혹시 밀드레드는 사후에 누군가가 읽어주기를 기대하며 그 일기를 쓴 것은 아닐까? 나 같이 잘 속는 사람을 설득하려고. 밀드레드가 정말 명석한 사람이었다면 이런 정교한 연출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펜을 잡은 사람은 펜과 함께 전지전능함도 함께 그러잡는 것이니까.
실제로 작품 속 아이다는 그 일을 해낸다. 아이다가 비밀리에 작업 중이었던 앤드루의 자서전은 오리지널 버전 외에도 두 가지의 버전이 더 있다. 자본주의를 혐오하는 아버지로부터 자본주의 끝판왕인 앤드루를 위해 일한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작성한 '아버지용' 문서 A. 그리고 앤드루와의 비밀작업을 폭로하겠다는,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모를 협박법을 위해 작성한 '협박범용'문서 B다. 자세한 내용은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대충 그 내용은 짐작할 수 있다. A에서 앤드루는 노동자를 존중하는 사업가로 묘사되었을 것이고, B에서 앤드루는 금융자본가인 것만은 그대로 남겨두고 그 외의 모든 배경과 활동내용은 사실과 다르게 작성했을 것이다. 그래야 읽는 사람을 만족시키면서도 안전한 글이 될 테니 말이다.
펜으로 그리는 세상은 펜을 잡은 사람의 손 아래에 있으며 그 손의 주인에게는 자유롭게 쓸 자유가 있다. 아이다는 그 힘과 자유를 아버지가 배신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고용주인 앤드루의 비밀을 지켜주기 위해 썼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오리지널 버전에는 아이다의 힘과 자유가 빠져있다. 그 빈자리를 앤드루가 차지한다. 이렇게 완성된 글은 아이다의 글인가 앤드루의 글인가?
속이 빈 펜을 쥐고 있는 아이다는 앤드루가 밀드레드를 왜곡하여 재현하고자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쓰라는 대로 써야 하는 고용인 입장에서는 달리 어찌할 도리도 없다. 개인적인 취재와 추리를 비밀스레 이어갈 뿐. 다행인지 불행인지 갑작스러운 앤드루의 죽음으로 자서전은 미완으로 남고, 아이다는 회고록을 통해 이번에는 펜을 '제대로' 쥔 사람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폭로한다.
"밀드레드는 원래 이러이러한 사람인데, 앤드루는 그녀를 저러저러한 사람으로 박제하려 했어요!"
하지만 아이다 또한 문서 A와 문서 B에서 앤드루를 왜곡했다는 점을 잊지 말자. 왜 우리는 그녀의 왜곡은 쉽게 용서하면서 앤드루의 왜곡은 불편하게 느끼는 걸까?
그건 의도의 순수성 때문이다. 아이다의 왜곡은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면 앤드루의 왜곡은 자기 자신만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아내를 납작하게 만듦으로써 자신의 업적을 도드라져 보이게 하려는, 아내의 일부만을 부풀려 자신의 치부를 가리려는 의도. 그런 불순한 의도 아래에서 밀드레드의 존엄은 훼손되고 존재는 도구로 전락해 버린다. 독자는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트러스트> 속 네 가지 이야기 중에 어떤 이야기가 가장 진실에 가까운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진실 폭로와 오명 씌우기, 부정(否認)과 은폐는 동전의 양면 같아 보인다. 작가가 보는 진실은 무엇일까?
어쩌면 작가가 심어놓은 진실은 중요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작품의 해석은 전적으로 독자 개개인의 몫이며 각 개인을 통과한 작품은 그 안에서 재구성되고 결국 수많은 작품으로 재생산되는 것이니까. 그런 식으로 작품은 자꾸만 확장되고 독자는 정답 없는 질문 사이를 거닌다. 그렇게 거닐기 위해서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