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하인리히 뵐
약국을 운영하는 한 후배는 진상 손님을 만나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해 버린다고 했다. 여러 방법을 시도해 봤는데, 그게 자기 정신건강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더라고. '저 사람 왜 저래?'라는 의문은 어차피 답이 없다. 상대의 기분, 정신 병력, 성격, 말투, 태도의 원인은 내가 알 길도 없고 파고 들어갈 이유도 없다. 게다가 저런 의문은 내가 여자라서, 내 말투가 신뢰가지 않아서, 내가 어려 보여서, 등등 본인만 더 괴로워지는 생각으로 끝없이 이어질 위험도 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저히 이해가지 않는 행동,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태도는 이해 없이 그냥 넘겨버리는 게 - 그게 또 쉬운 일은 아니지만 - 감정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더 현명한 처사임에 동의했다.
여기 다른 용도의 '그럴 수도 있지'가 있다. 소설『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의 주인공 카타리나는 어떤 범죄자와 공모했다는 혐의를 받아 경찰 조사를 받는다. 경찰 조사 중, 그녀가 가끔 밤중에 정처 없는 드라이브를 즐기는 사실이 드러나는데, 경찰은 그 외출을 수상하게 여긴다. 평소 절약하는 생활 습관으로 볼 때, 기름을 낭비하며 목적지 없는 드라이브를 하는 것은 앞 뒤가 맞지 않으며 그녀의 성실한 태도와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맹세코 그녀의 한밤중 드라이브는 가끔의 일탈이자 생활의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일 뿐이지만,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자기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럴 때 누군가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했다면, 그녀는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모순으로 가득하다. 때로 앞 뒤가 맞지 않는 말을 내뱉고,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소비를 하기도 하며, 갑자기 뜬금없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한 개인의 직업과 취미는 별개의 영역이고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에겐 한 없이 좋은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겐 지옥이 된다. 기승전결이 뚜렷한 삶, 원인과 결과가 한결같이 논리적으로 흐르는 인생은 없다. '그럴 수도 있지'는 이런 인간의 특징을 인정하는 말이자, 타인에게서 오는 피로를 벗겨내는 말이다. 여러모로 쓸모 있는 마음가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