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 나만의 순간 줍기 (1일 일줍 – 나만의 순간 모으기, 나를 즐겁게 한 것)
점심시간이면 냉커피 한 잔을 텀블러에 넣고 창덕궁 근처를 산책한다.
북촌, 종묘, 창덕궁, 익선동, 운현궁 등 가볼 만한 곳이 많기에 밥을 먹는 것보다 소중한 시간이다. 5월의 마지막 날이지만 햇살은 이미 초여름을 넘어설 정도로 따갑다. 이런 날은 운현궁 툇마루에 앉아 냉커피 한 잔을 마시는 것이 여유로움이다. 입구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자그마한 전시실이 있는데 오늘은 ‘내 안의 뜰’이라는 제목으로 민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열댓 점의 그림이 전시되고 있는데 책가도(冊架圖)가 눈에 들어온다. 반가웠고 한 장쯤 소장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책 한 줄 읽고 그림 한 점 쳐다보는 것이 독서의 즐거움이 아닐까?
돋보기도 보이길래 훨씬 더 친근감이 느껴지는 민화다. 뭐든지 감동은 처지가 같을 때 찾아오는 법. 자신의 정책성을 책으로 행복한 남자에게서 찾으면 좋겠다. ㅎㅎ
2. 오늘의 독서
1) 배경음악(my playlist)
LP 앨범으로 음악을 들을 때는 한 곡도 소홀히 여기지 않고 A면부터 B면까지 모든 음악을 들었다. 심지어 체제를 옹호하기 위해 음반의 마지막 트랙은 건전가요를 수록했는데 그 곡까지 들을 정도였다. 그러나 음악 감상의 주체가 CD로 바뀌면서 버튼 하나로 마음에 드는 곡만 선곡해 들을 수 있기에 앨범을 반복해 듣는 경우는 줄어들었다. 다양한 앨범 때문에 곡에 대한 선택이 넓어진 이유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Diana Krall의 ‘Wallflower’는 A면의 첫 곡부터 B면의 마지막 곡까지 빼놓지 않고 듣는다. 젊었을 때 들었던 익숙한 커버 곡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앨튼 존의 ‘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 이글스의 ’I Can't Tell You Why, Desperado‘ 마마스 앤 파파스의 ’California Dreamin', 등 이 제목만으로도 끌림이 있는 음반이다.
커버 곡을 원곡 이상으로 감동을 주는 가수는 그리 많지 않다. 영화에서도 1편을 뛰어넘는 속편이 없다고 할 정도인데 다이애나 크롤은 커버 곡을 자기화해서 새로운 곡으로 만들었기에 앨튼 존이나 이글스를 지워버렸다. 피아노 앞에서 노래하는 모습과 인생을 다 산 것 같은 쉰 목소리는 그녀만의 매력이다.
https://youtu.be/_hSn4-F4zjE?si=GTKzzuKiFgSUatP-
2) 독서
(1) 제목: 매일 읽겠습니다
(2) 저자: 황보름
(3) 읽은 페이지 : 1p부터 50p까지
(4) 기억하고 싶은 문장
'우리는 소설 속 인물들이 펼쳐 놓은 다양한 삶을 통해 ‘이렇게만 살아야 한다’가 아니라 ‘저렇게도 살 수 있다’라는 걸 이해한다. 현실과 편견이라는 좁은 시야에 갇히면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압박하기 쉽다. 보고 듣는 것들이 삶을 확장시켜 주기보다 도리어 한계가 되어 삶을 가로막는다. 지금, 이 삶에서 이탈하게 될까 봐 살얼음판 걷듯 살게 되고, 목표를 향해 열심히 살면 살수록 소극적인 태도가 굳어진다. 그러다 예상과 다른 오늘을 맞게 되면 털썩 주저앉아 절망한다. 절망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모르기에 더 절망스럽다.'
(5) 생각이나 느낌 쓰기
10대에서 20대 시절에 소설을 읽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소설은 데미안, 어린 왕자, 이광수의 사랑이다.
이광수의 사랑은 초등학교 5학년 겨울 방학 때 외삼촌 집에서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기에 남폿불 아래서 읽었다. 사촌 형의 책상에 꽂혀있던 ‘사랑’을 아무런 정보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날이 새고 말았다. 어린 나이이기에 플라토닉 러브가 뭔지 몰랐지만, 순옥이 보여준 자기희생을 보며 사랑은 순수하고 아름다워야 한다는 생각을 각인했다. 청년이 되어서는 김형석 교수의 영원과 사랑의 대화를 읽으며
“사랑하는 사람의 자유를 구속하느니보다는 차라리 내가 눈물을 흘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 “
를 사랑의 완성이라고 믿었다.
아직도 이 관점에서 벗어나지 않기에 사랑에 관해서는 이상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왜? 소설을 읽느냐? “
는 질문에 황보름 작가는 ‘이렇게만 살아야 한다’가 아니라 ‘저렇게도 살 수 있다’라고 대답한다. 법은 ”죄인인가? 아닌가?”라는 이분법으로 문제를 판단한다. 그러나 문학은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양한 삶의 방식을 인정하기에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다른 방법으로 산 사람에 대해 연민을 표하고 저렇게도 살 수 있다는 견해에 동조한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떠올릴 수 있다. 법적인 판단을 하면 바람난 유부녀의 어리석은 종말이지만 소설을 읽으면 그녀를 정죄하는 것보다 이해와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안타까움 때문에 명작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닐까?
‘저렇게도 산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