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에 시가, 다른 한쪽에 칼이 있다. 글은 양면적이다.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글과 달리 칼은 처음부터 생명을 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구다. 여기에 내가 다루는 칼인 플뢰레(Fleuret)의 아이러니가 있다.
펜싱의 세 가지 칼 중 하나인 플뢰레는 에페(Epee)의 연습 도구로 만들어진 칼이다. 중세로 돌아가 보자. 마스터가 두 수강생의 대련을 보고 있다. 대련의 룰은 단순하다. 찌른 사람이 득점하는 것이다. 문제는 한 수강생이 공격할 때, 다른 수강생이 그 칼을 막지 않고 같이 찌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둘 다 득점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동은 연습에서는 문제 되지 않지만 실전에서는 문제가 된다. 진검을 막지 않고 같이 찌르면 둘 다 죽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된 종목이 플뢰레다. '한 사람이 공격하면 상대방은 그 공격을 막고 공격해야 한다.'는 관습과, 상대가 다치지 않도록 칼끝에 꽃(Fleur) 모양의 버튼을 단 연습용 칼을 만든 것이다. 칼이되 상대를 해치지 않도록 만들어진 칼인 것이다.
플뢰레라는 칼이 탄생하던 시점에. 칼에게 꽃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누군가가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그 마음을 헤아려왔다.
한쪽에 시가, 다른 한쪽에는 칼이. 시가 누군가를 살리거나 죽일 수 있는가. 내게는 시를 써야 살아있다는 기쁨을 누리고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순간이 있었다. 내 글이 누군가를 해한 적이 있을까. 돌아보면 증오에 차 글을 쓴 적은 없었다. 앞으로도 없길 바란다.
삶의 궤적을 타이핑했을 때 그것은 때때로 시가 되었다. 그렇다면 칼의 궤적은 어떠할까. 펜싱이 삶의 동력이었으므로 펜싱이 나를 살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펜싱을 통해 만난 소중한 인연들이 있으니 내게 있어 칼의 의미는 죽음보다 삶에 가깝다. 앞으로도 증오의 마음으로 칼을 다루지 않게 되길 바란다.
시와 칼. 이 모든 것은 결국은 사랑에 관한 이야기.
나를 죽이고 살리는 것은 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사랑으로 인해 무너졌을 때 내가 붙잡은 것은 시와 펜싱이었다. 삶이 사랑으로 충만하였을 때 나는 그것을 시와 칼에 담아내고자 했다. 그러나 사랑은 그것만으로 완전했으므로. 무언가를 더하거나 뺄 게 없었으므로 그러한 작업은 쉽지 않았다. 드문드문 내가 쓸 수 있는 산문 몇 편을 썼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글이 사랑에 관한 비유로 읽히길 바란다. 아직 내게는 써야 할 시와 허공에 그어야 할 빗금이 많이 남았다. 밤하늘을 채우는 빗줄기의 전초와 폭풍의 가능성을 이곳에 엮는다. 그러니 사랑이여 내게로 오라. 푸른 파도처럼 밀려와 내 숨구멍 끝까지 가득 채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