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4 2호선 첫차에서 한 생각
첫차에는 말소리가 없었다. 대구에서 볼 일이 있었고 시간 맞춰 가야해서 6시 열차표를 끊었다. 집 근처 2호선 첫차를 탔다. 5:24이었다. 남편과 둘이서 새벽같이 집에서 나와 전철을 타는 게 나름 신선해서 종알종알 말을 하려는데, 뭔가 이상했다. 전철역 플랫폼에도 전철 안에서도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나도 말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좌석이 꽉 찬 건 아니었지만, 70프로 이상은 채워져 있었다. 첫차를 탄다 했을 때 내가 예상했던 그림과 달랐다. 심지어 새벽 첫차란 너무 한산해서 어쩐지 조금 무서울 수도 있겠다 생각했는데.
월요일이라 조금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대로 수서역까지 같이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고속열차로 출근하는 사람들인지, 동탄에서도 평택에서도 꽤 내렸다. 루틴하게 그 시간에 첫차를 타고, SRT를 타는 사람들도 꽤 있는 듯했다.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삶이 아직도 아주 많겠구나 생각했다. 아니, 내가 안다고 할수 있는 삶이 과연 얼마나 되겠나 싶다. 타인의 삶을 유심히 들여다 봐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텐데.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같은 SNS를 통해 세상의 많은 삶들을 본다고 생각하곤 했는데, 그 생각이 바뀌고 있다. 그곳들은 내가 즐기는 놀이터 중 한 곳이고, 많은 삶들은 진짜 삶의 현장에 있는 것 같다고.
얼마 전 한 교사의 죽음이 있었고, 나는 때때로 그 삶에 대해 생각한다. 떠오르는 생각들을 SNS에도 기록한다. 나역시 다른 이가 쓴 글들을 읽으며 현장의 삶이 더 나아질 방법에 대한 힌트를 얻고 싶어한다. 그러면서도 한편, 타임라인에서 희망차고 즐거운 것들을 보고 싶어하는 이웃들의 피로감에 대해 걱정한다. 하지만 안타까운 일들 앞에서 먹먹해지는 건 인간이기에 당연히 품어지는 마음이다. 학부모이기에 학교의 슬픔이 같이 느껴지는 것도 당연하고. 이 마음을 치우지 말자, 싶다.
아픔을 아프게 느끼는 것도 필요한 일인 것 같다. 우리는 삶의 아프고 슬픈 부분들을 마치 인공지능에게 맡겨버릴 참인 것 같을 때가 있다. 자연히 흘러나오는 삶의 고통은 우리를 성숙하게 하는 어려운 선물 같은 것인데, 인내라는 사용법을 잃어버린 우리는 고통을 끌어안지 못하고 자꾸 던져 버린다. 스마트폰 화면에, 또는 누군가에게.
대구에서 일을 다 보고, 이 하늘을 만나기 두 시간 전쯤, 차를 움직이기 힘들만큼 쏟아지는 집중호우를 만났었다. 비가 무섭다는 마음이 낯설고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다행히 피해없이 지났고, 두 시간 후에 이 하늘을 만났다. 무서운 하늘도, 찬란한 하늘도, 내 머리 위 어제의 하늘이었다.
삶의 찬란함도 괴로움도 내게 다가오는 그 감정들을 너무 빨리 보내버리지 않기로 하면 좋겠다. 온대로 내게 좀 머물다가 가도록, 기쁨도 고통도 나를 거쳐서 나갈 수 있도록 내버려 두면 좋겠다. 나의 삶은 물론, 타인의 삶을 대하는 자세도 조금은 그러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깊어지는 나의 모습을 나는 더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