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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디 Apr 12. 2020

나를 위해서 소비하는 삶

남 눈치 안 보고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 알기

중기청을 계기로 좋은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면서 인테리어 가구와 물건을 잔뜩 샀다. 가구를 고르는 건 굉장히 스트레스였다. 모양이 괜찮으면 원하는 색이 아니었고, 괜찮다 싶으면 내가 생각해뒀던 예산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가격과 상관없이 예쁜 것은 지르고 싶은 욕구가 들었다. 자꾸 '집들이'가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사용해야 할 물건을 구매해야 하는 것인데, 집들이 올 사람들의 시선으로 가구를 고르고 있었다. 나를 위한 물건이 아니라 남을 위한 물건을 사고 있었던 것이다. 가구뿐 아니라 옷을 살 때도 그러했다. '이 벨트 하면 사람들이 나를 좀 더 패셔너블하게 보지 않을까?', '이 옷은 카피 같아 보여서 나도 가짜 같아 보일 거야.' 남들이 할 것 같은 생각을 스스로 만들어내서 잣대를 세웠고 구매에 큰 스트레스를 줬다. 그렇게 옷 쇼핑은 계절이 돌아오면 해야 하는 지겨운 '관행'같은 게 되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와 닿자 나는 내가 그동안 무엇을 기준으로 소비했는지 혼란이 왔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뭘까? 내가 구매를 할 때 가장 우선시하는 것은 무엇일까? 인스타그램 광고에 혹해서 산 것이 아닌 정말 내가 설레서 사는 것들이 궁금해졌다. 내가 가진 것들 중 오롯이 나를 위해 산 것을 리스트로 몇 가지 적어보았다.



1. 보드게임: 사람들과 모여서 게임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집에서 편하게 게임을 즐기고 싶어서 구매했다.

2. 실크 재질의 옷: 어디에나 어울리기는 힘든 소재지만 내 눈에 예쁘니까 구매했다.

3. 블루투스 스피커: 영화를 볼 때 사운드가 큰 것이 만족스럽고, 평소에도 음악을 틀어 집을 카페로 만드는 것이 좋아 구매했다.

4. 유튜브와 넷플릭스 멤버십: 가장 많이 사용하는 상품에 더욱 투자하는 것은 마땅하다. 삶의 질이 높아지는 구매였다.

5. 지중해 분위기의 러그: 방을 따스해 보이게 만들고 내가 좋아하는 무늬가 그려져 있어 구매했다.



리스트를 적고 나니 드는 생각은 나를 위해서 구매하는 것에는 별다른 고민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은은하게 빛나는 재질을 좋아하고, 전자기기는 필요한 기능만 있는 적당한 가격대의 상품을 좋아한다. 남들을 위해서 구매한 것들은 브랜드, 트렌드, 색상 등 고려했던 기준이 너무 많았다. 정작 내가 좋아하는 것의 기준은 이렇게 단순한데.


리스트를 적고 나를 위한 소비 기준을 만들어도, 계속 남 눈치를 보며 소비하게 된다면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곧 나라는 생각을 버리자. 내 정체성은 단순히 유한한 물질로 정의하기에는 너무나 유일무이하고 무한한 것이다. 나는 나인 것으로 충분하다. 며칠 전에 '데런 브라운:미라클'이라는 마술쇼를 보았을 때, 존재만으로도 가치 있는 것에 대한 내용이 나와 필사한 글이 있다.



우리가 존재할 확률은 얼마고 그건 무슨 뜻일까요? 아빠의 정자 12조 마리 중 우리 이름 반이 적힌 한 마리가 엄마의 난자 수천 개중 나머지 이름 반이 적힌 하나와 어쩌다 만나게 됐어요. 이건 우리 잉태 과정일 뿐이고 하필 우리 조부모가 하필 우리 부모님을 낳아야 가능하죠. 인간이나 휴머노이드의 세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이 확률은 엄청나게 증가해요. 여러분은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완벽하게 대대로 이어져온 연속된 사슬 끝에 존재하고 거슬러 쭉 올라가 보면 70억 년 전 최초의 단세포 생물이 나와요.
그게 바로 기적이죠.


화장품 보관하기에 딱 적당한 다용도 보관함. 1년의 사용감이 덮개에는 그대로 나타나 있다. 잘 버텨줘서 고마워.



새로 살까 생각했던 화장품 보관함을 계속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이소에서 대충 구매해서 1년 넘게 사용하고 있는 제품인데, 남들 눈에는 꼬질꼬질하고 저렴해 보일 수 있다. 그럼 뭐 어때, 나는 지금도 잘 사용하고 있고 나름 집의 분위기와 들어맞는 라탄 패턴이 마음에 든다. 항상 무인도에 살고 있다는 생각으로 나는 나만을 위해 소비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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