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 2. 연분홍색 비옷 ; 다섯 살의 1초 공주

옷의 기억

by 인이상

사주팔자에 남자가 없다. 점집에 가면 늘 듣는 말이다. 타고난 운명을 들먹이는 게 우습지만, 사주팔자뿐 아니라 신점을 보이는 이들도 남자와 연이 없다고 단언했다. 남자 거부는 사실 외모 콤플렉스에서 시작된 자기방어 기제지만, 어릴 때부터 단련된 신념이라 바뀌지 않는다.


인생에 한 번도 이성에게 제대로 된 관심을 받아 본 기억이 없는 비극 같은 희극 인생에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한 명의 이성이 있었다. 유일무이하게 이성에게 이성의 감정으로 받아들여졌던 가장 순수한 에피소드 하나가 5살 때쯤, 아빠 엄마와 길을 걷던 내 옆에 바짝 다가선 아이에 대한 기억이다.


그 아이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아는 것은 나와 비슷한 또래의 성별이 다른 아이였다는 사실뿐이다. 내가 입고 있었던 옷만은 기억이 선명하다. 예쁜 연분홍색 비옷이었다. 레인 코트와 레인 해트로 구성된 비옷으로 모자는 보닛 스타일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엄마가 짜준 옷을 제외하면 좋은 기성품 옷을 입었던 기억이 거의 없는데 그 연분홍색 비옷은 정말 특별했다. 그 옷을 입고 있었던 그 순간은 공주가 된 듯했다. 어린 나이에도 내가 공주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외모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 옷을 입을 때만큼은 못난 아이가 아닌 사랑스러운 아이가 된 듯했다.


예쁜 연분홍색 비옷은 깡마른 볼품없는 아이였던 본래의 내 모습을 가려줬다. 깡마른 몸에 살짝 부피감을 부여한 레인 코트와 복고 스타일의 모자가 나를 꽤 볼품 있게 했다.


나는 공주 옷을 열망했던 기억이 없다. 프린세스 슬리브가 달린 잘록한 허리선의 상의와 풍성한 벌룬스커트의 만화 속 주인공 같은 공주 드레스를 사달라고 졸랐던 기억이 없다. 100 미터가 안 되는 거리를 사이에 둔 높은 계단 위에 성처럼 우뚝 세워진 앞집만큼이나 나와는 거리가 먼 세상이라고, 너무 일찍 현실을 알아버렸다.


이때부터였던 듯하다. 선천적 외모와 다른 후천적 외모의 존재를, 선천적 외모는 의지대로 할 수 없지만, 후천적 외모는 전적으로 내 의지에 좌우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흔한 “딸 예쁘네요”라는 인사치레 말조차 듣지 못했지만, 나도 꾸미면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됐다.


사춘기 공상은 이렇게 서서히 실체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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