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의 기억
기억이 머리에서 뒤엉킨다. 학교에 가면 신발을 벗고 실내화를 신을 때였다. 상황이 선명하게 기억되는 거로 미뤄볼 때 10살 때쯤이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 점심시간에 밥을 먹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책상 사이를 기어가다 실내화가 벗겨졌다. 순간 본능적으로 심장이 멈추고 아찔했다. 빠른 속도로 실내화를 신으면서 오만가지 생각이 들고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이 기억 때문일까, 나는 아직도 두근거림이 설렘인지, 두려움인지 잘 구별되지 않는다.
실내화가 벗겨지면서 여기저기 기운 양말 바닥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심지어 꽤 큰 구멍까지 나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황급히 실내화를 신었지만, 누더기 상태의 양말을 같은 반 친구들이 봤다는 생각에 진땀이 났다.
우리 집 사정이 그때 좋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주식 투자 실패로 있는 돈을 거의 다 잃다시피 한 아빠는 답답한 마음에 장충단 공원에 가서 눈물을 쏟아냈다고 했다. 그 뒤로도 집안 사정은 크게 좋아지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아빠의 18번은 가수 배호의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이었다.
그렇다고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누더기 양말을 신은 것은 아니다. 아빠는 근검절약을 신봉해 엄마와 나는 그런 아빠를 구두쇠라 불렀다. 양말이 해졌다고 버리는 일은 없었다. 한, 두 군데 두 번 세 번 꿰매는 것은 예사로 있는 일이었다. 불만이었지만 습관이 된 일이라 신발만 안 벗으면 된다고 하는 마음으로 신었다.
그런데 그때 그 순간만큼은 누더기 양말이 수치스러웠다. 바닥이 여기저기 뚫린 흔적이 역력한, 누가 봐도 버려야 할 양말이었다. 아이들 앞에서 순간적으로 느낀 수치심은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을 더욱 더 냉철하게 받아들이게 했다.
이때부터 나는 공상에 빠지는 횟수가 잦아졌던 듯싶다. 원래 없었던 공부에 대한 흥미가 바닥나고 공부하라는 아빠의 다그침은 되레 나의 무력증을 키웠다. 나는 내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몰랐다. 차라리 아빠나 엄마가 “너는 못났으니까, 공부를 열심히 하면 친구들도 많이 생길 거야” 했다면, 오빠한테 한 것처럼 “이번 시험 잘 보면 사고 싶은 거 사줄게” 했다면 아마도 공부의 의욕을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여기저기 구멍이 나 기운 양말을 신어야 하는 내가 공부는 열심히 해 뭐할까,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도 같다. 그저 해야만 하는 공부에 매달리기보다 공상에서나마 기운 양말 대신 그럴싸한 옷을 입고 누군가와 다정하게, 때로는 에로틱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상황을 촘촘히 그려보는 것을 택했다.
10대 사춘기 공상은 그렇게 내 삶을 뒤덮었고, 우울한 사춘기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