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의 기억
“외면이 아니라 내면을 키워.” 검증이 필요 없는 진리로 받아들이는 이 말이 과연 진실일까. 외면은 내면의 창이다. 링컨이 남긴 명언,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져야 한다. 마흔 이후 얼굴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는 내면과 연결된 외면의 책임에 관한 언급이다.
내양이 외양에 끌려다니고 외양의 욕망을 충족하는 수단으로만 기능하면 성형 중독, 쇼핑 중독 등 외양 중독증의 정신장애로 이어진다. 역으로 내양이 균형 잡히면 외양 역시 그에 상응하는 균형을 갖추게 된다.
삶의 정글이라 불리는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마음만으로 되지 않는 또 다른 공감의 영역이 있다. 사적 생활에서는 외면과는 다른 내면을 알아갈 여유를 가질 수 있지만, 이익 집단인 공적 생활은 상대를 인식하고 판단하는데 허용되는 시간과 속도가 짧다. 링컨의 외면에 대한 책임은 구구절절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자신의 내면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외면을 갖춰야 한다는 의미다.
패션 문외한이 어쩌다 보니 패션 언저리에 발을 들여놓았다. 운명처럼. 전의식에서 내 우울감과 무력감의 동력이 돼온 사춘기 공상은 의식의 세상 밖으로 나올 기회를 포착했다.
패션에 무지몽매했던 상태로 시작한 사회가 녹록하지 않았지만, 아무짝에도 쓸모없던 ‘나 홀로 공상’이 상황 관찰과 분석력으로 전환돼 버텨낼 수 있는 기초 자원이 됐다. 공상이 해준 몫은 거기까지다. 공상은 공상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사회생활은 소극적 방식으로서 공상과는 다른 적극적 방식으로서 소통이 요구된다. 소통은 공감과 설득이 오가는 상호교환의 체계로, 대화 상대가 될 만한 자질이 외면으로 드러나야 한다.
패션에 ‘패’자도 모를 거 같은 외양은 신뢰 형성에 장애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내 외양은 패션 문외한이라는 사실을 200% 입증했다. 공상에서만 키워 온 외양에 관한 상상의 나래는 현실에는 무용지물이었다.
남들은 사춘기를 지나 대학 시절 조금씩 쌓아왔을 외양 표현의 기술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무엇보다 외양 표현의 부족한 기술이 실은 내양의 기초 소양 부족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공상에만 빠져 무지몽매한 채로 10대와 20대 초반을 소모한 뒤였다.
서툰 시작의 결말은 비극일까, 희극일까. 내 공적 생활은 비극과 희극을 어지럽게 오갔다. 찰리 채플린은 “삶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지만, 비극과 희극 모두 공허하다는 점에서 본질은 비극이다.
내 서툰 시작이 공허한 비극으로 막을 내리게 될지, 평온하고 소박한 서사로 막을 내리게 될지. 앞으로 내가 겪게 될 나의 현재들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