雪木, 설목
#. 당귀잎, 다크 초콜릿, 바닐라
사계절, 마지막 겨울을 지나는 시간,
새로운 해를 맞이하며 시작하는 1월.
지난날에 대한 즐거움과 아쉬움
시작이 주는 설렘과 작은 두려움
온갖 감정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달.
12월을 지나 1월, 갈수록 짙어지는 겨울에
온몸을 꽁꽁 감싸 보아도
매서운 겨울바람에 어느 순간
발갛게 물들여 버리고,
푹 눌러쓴 복슬복슬한 털모자 사이로
차가운 겨울 공기와 바람은 위잉 위잉
쉴 새 없이 말을 건네 온다.
여름, 가을 쉼 없이 밝게 빛나던 해는
짙은 회색빛을 머금은 구름에 꽁꽁
덮여버리고, 푸른 하늘 대신 우중충한
날들이 일상이 되어버리는 겨울날,
그럼에도 겨울의 고요함, 서늘한 향,
짙은 회색빛 사이 이따금 내리쬐는 햇빛,
검은 쪽빛을 품은 밤하늘.
앙상해진 가지만 남아
푸릇함을 잃고 잎이 사라져도,
추운 바람에 바래고 말라버렸어도
존재 자체로 눈을 끄는 겨울나무.
냉정 한듯한 순간 속 조그맣게 자리 잡은 다정함,
깊은 정적 속 배어있는 우아함은
결국 겨울에 반하게 만든다.
마치 스노우볼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던
흰 눈이 하염없이 내리던 날,
눈이 그치기 전에 나갔던 산책
산과 땅, 모든 것들이 하얗게 물들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면
얼굴을 향해 쉴 새 없이 떨어지던 눈.
푹푹 꺼지는 발자국과
뽀득뽀득한 소리들,
벤치 위에 쌓인 눈을 툭툭
털어내고 앉아서 하염없이
바라보았던 겨울 풍경.
그 속에서도 눈을 끈 건
고요히 내린 눈이 소복이 쌓여
바랜 가지 위를 감싸 안아,
어느새 하얗게 물이든 나무들
그 순간의 나무가
산책 끝에 돌아오는 순간에도,
눈이 다 녹아 없어진 후에도
이따금 생각이 났다.
부드러울 것만 같은 하얀 설원 아래
단단하게 얼어붙은 땅,
그 속에 뿌리내린 겨울의 나무.
나무를 감싸는 것, 다른 계절에는 볼 수 없는,
눈이 오는 순간에만 볼 수 있는 겨울 풍경.
잊히지 않고 계속 떠오르는 나무에
그 시선을 담아 과자로 작업해보자 하곤
노트를 꺼내 그려보기 시작했다.
짙은 밤나무 빛 나무는 진한 다크 초콜릿으로
위에 하얗게 빛나던 눈은 바닐라크림으로
틀을 정하고 초콜릿을 받쳐줄 재료를 고민했다.
안 써본 재료들 중에 초콜릿과 잘 어울릴 만한
독특한 재료가 없을까,
나무향이 나는 재료가 없을까, 생각하다
생강으로 만들어볼까 했지만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시 처음부터 틀을 그려 나가다
재료를 잔뜩 적어둔 노트에 당귀잎이 눈에 띄었다.
당귀의 오묘한, 마른 한약재에서 나는 향이
겨울의 나무와 조화롭게 어울릴 듯했다.
당귀 특유의 쌉싸래한 맛과,
은은한 한약재의 향, 끝에 남는
묘한 단맛이 메인으로 정한
초콜릿에 독특한 맛을
더해줄 것 같아 당귀+다크 초콜릿
조합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오페라처럼 얇은 시트와 가나슈,
버터크림 대신 진한 초콜릿 무스를 넣어
쌓아 올리는 무스케이크 구성으로
레시피를 작업했다.
보통 시트와 달리 입안에서 부드럽게
넘어가는 식감을 원해 가루류를 넣지 않고
만드는 비스퀴 상파린으로 시트를 만들었다.
일반적으로는 코코아 가루와 머랭으로 만들지만
이번에 만든 비스퀴는 다크 초콜릿과 머랭으로
만들어서 더 진한 맛이 나지만
공기를 머금은 초콜릿같이 가벼운 식감이 난다.
당귀잎을 넣고 인퓨징 한 크림을
넣은 다크 초콜릿 무스,
가나슈에는 인퓨징 한 크림과 잘게
다진 잎을 추가로 넣어 당귀 맛이
더 진하게 나도록 만들었다.
약간은 무거울 수 있는 당귀+초콜릿에
조화를 위해 크림의 비율을 높여
가볍게 만든 바닐라 무스를 올려 균형을 맞췄다.
굳힌 무스 위에 마스카포네 샹티로
데코 한 후 당귀잎을 올려 마무리한다.
진하지만 무겁지 않은 초콜릿의 맛
부드럽게 녹아드는 식감
쌉쌀한 당귀의 향
끝 맛에 남는 부드러운 바닐라 무스
흰 눈이 소복이 쌓여 있던 겨울나무
잘게 잘게 갈라지고, 겨울바람에
바래진 밤색 빛 나무와,
그위를 감싼 새하얀 겨울 솜.
오랫동안 아른거렸던 겨울날의 나무
雪木, 설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