栗雲: 밤구름. 23年
#. 공주밤 취나물 우리밀
볕은 하루하루 더 진해지고
하늘도 따라서 더 푸르러지는 계절.
진한 초록으로 가득했던 풍경은
서서히 바래져 가고,
후덥지근한 물기로 가득했던 바람은
어느새 선선한 공기를 품고 불어온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여름은,
언제나 푸르를 것만 같던 녹빛의 풍경은
흐르는 시간 속에 서서히 물들어
그 끝에 자신의 색을 쏟아내고.
유난히 길었던 이번 여름은
내가 좋아하는 가을을 쉽게
보여주지 않았다.
물들어갈 때 즈음 비가 오고
다시 바래져 갈 때즈음 기온이 올라가는걸
반복하더니 어느 순간 온도가 뚝 떨어져
날씨에 맞춰 우왕좌왕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늦가을에 와있었다.
붉은빛과 주황빛
짙은 노랑빛으로 물든 잎들은
순식간에 갈색빛으로 바래져 가고
생기를 품고 있던 나무와 풀은
서서히 짙어지고 우아한 기운을 뿜어낸다.
쉴 틈 없이 흘러갔던 순간 속에서,
그럼에도 가을을 느낄 수 있었던 건
서늘한 아침공기와
어딘가 쌉쌀한 바람의 향,
바스락거리는 바랜 잎들의 소리.
한 발 한 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몸을
감싸오던 온기를 머금은 가을의 볕.
땅을 덮은 낙엽들 사이에도
비스듬히 얼굴을 내민 가을 들풀
이리저리 흔들리던 솜털 같은 억새풀
부숭부숭한 털옷으로 덮인
가을열매와 같은
순간순간이 담겨있는 가을의 흔적.
그 흔적을 하루하루 바라보다
짙은 녹빛에서 바랜 가을빛으로
변하는 그 찰나의 풍경을
이번 첫 계절그릇으로 담아내고 싶었다.
바래져 가는 것들 사이에도
느껴지는 초록의 향.
바람에 물들어 생기를 잃어도
더 반짝이는 것들.
하나 둘 떨어져 사라지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운 것들
내가 느낀 늦가을의 풍경을
과자로 표현해 보자 마음먹고는
제일 먼저 떠오른 건 고소한 맛의
취나물이었다.
참나물과 비슷하지만 더 고소하고
힘이 있는 잎과 줄기
짙은 초록을 품고 있는 풀
가을의 풍경을 머금고 자라나는
파근한 밤
흰 설탕의 깨끗한 단맛과는 다른
복합적인 맛이 나는 사탕수수당과
진득한 꿀의 향
파슥파슥 부서지는 낙엽의 소리를 닮은
머랭쿠키
함양군에서 재배한 앉은뱅이 밀로 만든
고소한 우리밀 비스퀴
하나하나 눈으로 담았던 풍경을 그리며
레시피를 적어나갔다.
이번 작업에서 제일 어려웠고
공을 들였던 건 취나물크림.
보통의 허브처럼 향이 진하고
진한 맛이 있는 종류가 아니어서
취나물 고유의 맛을 끌어내는 게
상당히 어려웠다.
향이 약해서 많이 넣으면
쓴맛이 강해지고
쓴맛을 걱정해서 적게 넣으면
풀의 향이 느껴지지 않았다.
취나물은 생각보다 고소한 편이어서
많이 넣으면 생크림의 고소함과
겹쳐져서 취나물의 매력을 잃어버린다.
내가 원하는 풀이 주는 푸릇함과
취나물이 갖고 있는 고소함을 살리면서
몽블랑의 주인공인 밤이 사라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그런 과자를 만들고 싶어서
정말 많은 테스트를 했다.
정말로 어려웠지만 결국 많은 테스트 끝에
원하는 식감과 향,
맛의 크림을 만들 수 있었고
그렇게 23년 밤구름을 작업했다.
밤페이스트를 사용해 만든 밤크림은
특유의 무거운 느낌을 좋아하지 않아서
최대한 가볍고 달지 않게 작업하고
한번 체에 내려서
더 부드러운 식감을 내게 했다.
그리고 몽블랑에서 정말 좋아하는 구성인
머랭쿠키는 사탕수수당과
꿀만 넣어 만들어 독특한 풍미를 줬는데
마치 가을의 향과 닮아있다.
입안에서 경쾌하게 부서지는 식감은
가을 거리에 낙엽을 떠올리며 작업했다.
마지막은 우리밀로 작업한 비스퀴
주간과자도감을 작업하면서도,
이번에 작업실을 내게 됐을 때도
우리밀을 사용해서 작업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어느 나라 밀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물론 맛도 다르고 가격도 다르고
풍미도 다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느 특정한 나라의 밀가루만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번에 내가 우리밀을 사용한 건
한국에서 나는 재료들로
첫 계절그릇을 작업하고 싶었고
또 내가 원하는 몽블랑의 맛과
우리밀의 고소한 맛이
잘 어울릴걸라는 생각에 선택하게 되었다.
처음 사용해 본 우리밀은 생각보다
훨씬 매력적이어서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리저리
맛있는 과자를 작업하고 싶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다시 돌아온 주간과자도감
앞으로 보네에서 작업하는 과자들을
다시 도감에 기록하려고 합니다.
보네에 오신 손님분들 중에
주간과자도감을 보고 오셨다는
손님분들이 많아서 정말정말 놀라고 기뻤어요.
아마 보네는 제가 하고 싶었던 것들,
하고 싶은 것들을 모두 모은
공간이 될 것 같아요.
그래서 보통의 공간과는 조금 다르겠지만
마음을 다해서 ,
사랑과 낭만을 담은 곳으로 만들어가겠습니다.
보네에 놀러 오세요!! :-)
연두빛 새순과 짙은 녹음의 시기를 지나
서늘한 바람, 따뜻한 햇살에 가을빛으로 물든 나뭇잎,
짙어진 나무줄기, 바스락거리는 바랜 풀,
온갖 색으로 물든 땅과 가을볕을 머금은 금빛 물결
바래져 가는 것들 사이에도 짙은 초록의 향.
栗雲, 밤 구름
23年11月
공주 밤과 우리밀
그리고 취나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