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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에 서서, 진실을 파헤치기

『혼모노』, 성해나, 창비, 2025

by 두부먹는호랑이

소설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나를 대변해 주는 듯한 사건과 문장을 발견하며 나를 또렷하게 만드는 이야기, 또 하나는 나와 동떨어진 사건이 휘몰아쳐 나도 모르게 낯선 곳에 서 있게 되는 이야기. 성해나의 『혼모노』는 후자였다.


‘넷플릭스 왜 보냐. 성해나 책 보면 되는데.’라던 박정민 배우의 말처럼 신선하고 감각적인 일곱 가지의 이야기는, 넷플릭스에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소재나 사건 자체가 흡입력 있었다는 이야기다. 특히 「혼모노」는 휘몰아치는 속도감이 남다르게 느껴졌다. 넷플릭스와 다른 점이 있다면 홀린 듯 다음 편 버튼을 누르는 게 아니라 단편 하나를 읽고 난 다음 꼭 쉼표를 찍어야 했다는 점이다. 책을 들면 한 권을 쭉 파는 것을 좋아하는 내가, 혼모노를 읽는 동안 무려 두 권의 책을 병렬독서 했다.


분명 책을 들면 막힘없이 읽혀 나가는데, 틈이 날 때면 다음 편을 빨리 읽으려 책을 들게 되지는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단편 간의 공백 동안엔 나를 둘러싼 여러 진짜와 가짜가 교차했다. ‘길티 클럽’과 ‘구의 집’을 읽고 때때로 겪은 맹목적인 믿음과 눈 감은 진실, 같잖은 위선을 떠올렸고. ‘스무드’에선 요즘 나의 최대 관심사, 그들은 왜 이쪽 혹은 저쪽에 갇혀 버렸나, 그 개인은 누구인가. 집단으로 싸잡아 비판할 자격이 각각에게 있는가. 이런 식의 소재로 사용하는 것 또한 비약이자 평면화는 아닐까. 갈팡질팡했다. ‘우호적 감정’과 ‘메탈’에선 세상 사는 게 다 그렇지 하며 지나쳐 온 진실 혹은 거짓인 모호한 것들을 곱씹었다. ‘혼모노’와 ‘잉태기’는 마지막 문장을 읽고 한참 멍해 평론(해설)으로 바로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는데, 꾹 참고 끝까지 읽어냈다. 그리고 양경언 평론가의 해설은 나의 멈춤에 대한 답부터 서둘러 안겨 주었다.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여느 마침표가 성해나의 작품에서만큼은 완결을 위한 기능으로 쓰이지 않는다. 독자는 한동안 이야기가 지나간 자리에 우두커니 머무는 듯한 기분이 들 것이다.”


“마지막 문장 끝에 찍힌 마침표가 결말 자리에 덩그러니 남겨진 독자를 비추는 거울 같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성해나의 소설을 막 읽은 뒤 독자는 요동치는 감정의 파동을 감당하면서 스스로에게 물을 수밖에 없다고.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


나는 굿판에 올라가지 않았지만, 나 또한 최근 나의 ‘진짜를 판명하려’ 혹은 ‘진짜가 되고자’ 심판대에 나를 올려 놓았다. 치열하지 않은 나는 결국 각자의 진실은, 진짜는 믿고 보고 싶은 방향대로 흘러 가기에 절대적인 진실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내가 딛은 현재 위에 내가 추구하는 진실의 방향은 종종 파헤쳐 볼 필요가 있다. 성해나의 혼모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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